평범한 시민인 우리가 왜? 정치인들에게 더 분노하는가?
우리나라는 초등 교육이 시작되면 첫 시간 ‘도덕’(슬기로운 생활)이란 과목으로 수업을 배운다. 초·중·고등학교에서 기본과목으로 채택되었으며, 성년이 되어 사회에 출발하는 독립된 개체로 공동체를 만드는 국가와 사회에 관한 법과 규범, 책임을 다하도록 바른 생활의 규칙을 실천해야 하는 당위성을 배운다. 이러한 배움이 사람마다 법과 도덕에 대한 관념은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도덕에 대한 형성은 너와 나를 이루는 공동체 문화에 많은 영향을 준다. 사람들은 때때로 도덕보다 법을 우선으로 생각하지만, 인간은 양심이라는 도덕적 관념을 벗어던질 수 없다. 여기서 발생하는 자신의 이익과 상충하는 도덕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이익 택할 것인가는 개개인의 문제지만 도덕적 양심을 제어하지 못할 때, 법은 처벌이라는 규칙을 만들어 사회에 적용한다. 인간은 법의 규칙 민· 형사적 처벌이라는 제재가 가해지기 때문에 인간의 욕망 줄이면서, 사회적 동물이 되어간다.
평범한 시민인 우리가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배운 도덕을 바탕으로 왜 법과 질서를 지키면서 좀 더 양심적으로 행동해야 하는지 알고 있고,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평범한 시민인 우리가 우리의 기본 질서를 잘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는데, 세금 받으며 국가를 운영하는 정치인들이 평범한 시민보다 더 못한 불법적 행위로 법을 짓밟는 것을 보면서 정치인들은 ‘뭔가 다를 것이다, 뭔가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들이 평범한 시민인 우리보다 더 도덕과 법을 지키지 않거나, 법 위에서 군림할 때, 정치인들에게 분노를 느낀다.
계엄선포
평범한 시민의 걱정거리는 2025년 되면 경기침체와 부동산 경기가 하강할 것인가? 수출국인 우리나라 상품이 세계 침체 속에 빠져 일어서지 못한다면! 소련과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시리아 등을 바라보면서 전쟁이 어제 끝나나? 이러한 사소한 걱정을 하면서, 러시아에 파병한 북한 군인의 죽음이 더 가슴 아팠다. 반쪽 남·북의 현실에 더 민감하게 느껴졌고, 전쟁이 대한국민 안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을 감사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뜬금없이 발포된 계엄선포에 우리나라가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다. 전쟁과 사회적 혼란이 일어난 것이 아닌데, 뭣 때문이야! 의아하기만 했다. 그런데 그 중심의 한 축이 미신이라는 무속신앙이 자리 잡고 있었다니 더 어이가 없었다.
태양을 바라보고 비가 내리길 기원하거나, 물을 떠 놓고 달을 보고비는 소원이, 이런 소망이 이루어질 때 저 하늘의 태양과 달의 신이 응답한 결과라고 생각하는가! 혹은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그들만의 신이 그들만을 위해서 존재하며 그들의 믿음에 답하는 것으로 생각하는가! 그러기에는 신의 세계가 너무 불공평하지 않는가! 전쟁에 시달리는 팔레스타인에게 이슬람의 알라신은 왜 대답하지 않는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을 전쟁의 그늘에서 보호해 주지 않는가! 이러한 알라신은 위대하지 않아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교도에게만 적용된 하나님의 벌인가! 우리가 믿는 신이 이렇게 부조리한 신이라면 우리가 믿는 ‘위대한 신’에 문제가 있는 것이며, 이러한 신에게 열망하는 인간도 문제다. 남보다 더 많은 부와 명예에 대한‘탐욕과 욕망’이 신의 실체다.
주술과 종교
『주술의 기초가 되는 사고 원리
첫 번째 : 유사는 유사를 낳는다. 결과는 원인을 닮는다. (유사의 법칙) -주술사는 바라는 어떤 것을 모방함으로써 결과를 끌어낼 수 있다고 추론한다. - (동종주술, 모방주술)
두 번째 : 한번 접촉한 사물은 물리적 접촉이 끊어진 후에도 계속 작용을 미친다. (접촉의 법칙) -주술사는한번 어떤 사람과 접촉한 물체가 그가 행하는 모든 행위는 그 물체가 그 사람의 신체 일부와 모든 것에 그 사람에게 똑같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추론한다. - (감염주술)
-주술사는 자기가 주술을 행할 때 응용하는 것과 똑같은 원리가 생명 없는 자연의 운행까지도 규제한다고 생각하면서 속으로 믿는다.
-주술사는 유사법칙과 접촉법칙이 인간 행동에서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라고 암시한다. 주술은 그릇된 행동의 지침일 뿐 날조된 자연법칙의 체계이며 덜떨어진 기술인 동시에 거짓 과학이다.
자연법칙의 체계, 세계 전반의 질서를 결정하는 규칙의 표현이라고 간주 되는 주술을 -이론주술이라고 부른다.인간의 목표달성을 지키는 계율로 간주하는 주술은 –실천주술이라고 부른다. 원시적인 주술사는 주술을 실천적인 면에서만 알고 있다. 즉 자기실천의 근거가 되는 심리적 과정을 분석하지 않고, 자기 행동에 내포된 추상적 원리를 성찰하지 않는다. 주술을 믿는 자는 과학을 믿지 않는다. 그 미개한 정신에는 과학이라는 개념이 들어 있지 않다. 날조된 과학을 가려내는 것은 철학의 몫이다.
이 글에 따른 터부와 주술의 관계에 대한 몇 가지 제시된 동종주술과 모방주술 감염주술의 예(ex)이다.
에스키모인; 소녀들이 실뜨기 놀이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것을 하면 나중에 작살 줄에 손가락이 감기는 재난을 당한다고 생각한다.
카르파티아산맥 후줄족 : 사냥꾼 남편이 식사하는 동안에는 아내가 물레질하지 못하게 한다 -그것을 어기면 사냥감이 물레 가락처럼 빙빙 돌아 사냥꾼이 사냥감을 맞추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블랙 풋 인디언 : 독수리 덫을 놓고 감시하는 동안 장미꽃봉우리를 먹지 않는다 -독수리가 덫에 가까지 내려앉았을 때 감시자의 뱃속에 들어 있는 장미봉오리가 독수리를 간지럽게 만들어 독수리가 미끼를 먹지 않고 몸뚱이만 긁게 된다는 것이다.
◉ 이런 주술적 영향이 상당히 먼 거리까지 미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하며 이처럼 공감작용이 멀리 떨어진 사람이나 사물이 상호 간에 영향을 미친다는 믿음이 주술의 본질에 속한다.
-동종 주술(감염주술)은 멀리 떨어진 물체들을 연결해 서로 영향을 끼치게 한다는 가정되는 물질적 매체다.
오스트레일리아 부족 : 성인식에서 당사자인 소년의 앞니를 하나 이상 뽑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이다- 이빨이 잇몸에서 뽑혀나간 후에도 그 소년과 이빨 사이에 공감 관계가 계속 존재한다고 그들은 믿는다.
캐롤라인 군도 : 탯줄을 조개껍데기 속에 넣어 부모가 선택한 아이의 장래에 적합한 방식으로 처리한다 -나무타기 명수가 되기를 바란다면 탯줄을 나뭇가지에 걸어 놓는다.
라인 지방의 바이에른 : 탯줄을 남자아이면 칼로 자르고, 여자아이면 바늘로 찢어 아마 천으로 보관한다 -숙련된 기술자나 재봉사가 되기를 바란다.
◉동종주술(감영주술)의 사례는 머리카락이나 손톱같이 신체에서 떨어져 나간 부분과 그 사람 본인 사이에 주술적 공감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의 머리카락이나 손톱을 획득하면 아무리 먼 곳에서도 원래 주인에게 자신의 의지를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이러한 관념들의 잘못된 결합은 동종주술 모방주술 낳고, 근접한 관념들의 잘못된 결합은 감염주술을 낳는다. 결합의 원리는 탁월한 것이며, 인간 정신이 작용하는데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합당하게 응용하면 과학이 생겨나고 부당하게 응용하면 주술이 생겨난다. 따라서 모든 주술은 필연적으로 거짓이고 무익하다고 영국의 사회인류학자 제임스가 황금가지≪조지 프레이저가 신과 종교를 주제로 저술한 책 ≫에서 말한다.
신은 누가 만들었는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발명해 내야 한다』 18세기 늙은 죄인이 있었는데, 신이 없다면 그것을 발명해 내야 한다는 말을 했다. 그래서 인간은 정말로 신을 발명해 냈다. 그러니까 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건 이상할 것도 놀라울 것도 없는 얘기이고, 오히려 정말 놀라운 것은 그런 생각이- 신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 – 인간과 같이 야만스럽고 사악한 동물의 머릿속에 떠오를 수 있었다는 사실. 이 생각은 성스럽고, 감동적이고, 현명하고, 그 정도로 인간의 위신을 살려준다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 :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해변을 걷다 보면 자갈들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것이 아닌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자갈들은 해안선의 크기에 따라 작은 자갈 띠, 큰 자갈 띠 등 각각의 띠를 이루고 있다. 그 자갈들은 분류되고 배열한다. 이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을 인간은 신화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신화는 단정함을 좋아하는 마음과 질서 의식을 가진 ‘하늘에 위대한 정신’에 관한 것일 것이다. 그러한 미신을 들으면 진리를 깨달은 자는 물리의 힘이 파도의 작용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것을 설명할 것이다. 파도는 목적도 의도도 갖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특별하게 단정함을 좋아하지 않는다. 파도는 단지 이리저리 굴릴 뿐이다. 큰 자갈과 작은 돌이 나름대로 방식으로 반응한다. 해변의 자갈들이 크기대로 모여 띠를 이루는 것이 사소한 것이지만 무질서로부터 질서가 나왔으며, 이 과정에 어떠한 마음도 개입하지 않는다. 파도와 자갈이 자동으로 질서를 만들어내는 간단한 체계이다.
질서를 만들어내는 방법으로 단순한 예(ex) : 구멍
구멍보다 작은 물체만이 구멍을 통과할 수 있다. 구멍 위에 아무 물체나 올려놓고 이리저리 흔들고 굴리면 잠시 후 구멍의 위와 아래로 물체들이 나누어진다. 구멍 위에 모인 물체는 아래에 모인 것들보다 클 것이고, 아래에 모인 물체들의 위에 모인 물체보다 작을 것이다. 인간은 질서를 만들어내는 이 단순한 원리를 이용하여 체라는 도구를 만들어 오래전부터 사용해 왔다.』≪리처드 도킨스 : 눈먼 시계공≫
◆황금가지를 통해서 주술과 종교의 잘못된 믿음이 인간을 농락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농락한 자 또한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이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란 소설을 통해서 사악하고 야만스러운 인간이 필요에 의해서 신을 만들었다고 한다.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를 말하고 있다.
눈먼 시계공에서 자연의 신비함은 그냥 자연에 가해지는 압력을 동해 만들어지는 질서이며, 이성적인 인간은 이러한 자연의 신비를 이용하여 과학적이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이 세 권의 책을 이용하여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이 믿는‘신’의 허상에 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종교를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한다. 각자 개인적, 문화적, 종교적 관점에 따라 서로 다른 정의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폴 틸리히는 종교는 ‘궁극적인 관심’이라고 정의했다. 궁극적 관심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종교가 된다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건강이라면 건강이 바로 종교가 된다는 것이다. 돈, 성과 같은 것이 우리의 관심을 송두리째 사로잡는다면 그대로 다 ‘종교’ 자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재물, 권세, 성, 명예 같은 준궁극적인 그것에 관한 관심을 같은 것을 ‘가종교’라고 한다.
민족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같은 정치 이념· 사상 체계나 교리는 ‘사종교’라고 한다.
진정으로 궁극적인 것에 대한 궁극적 관심을 둔 것을‘종교 자체’라고 보았다.
『종교란 무엇인가』에 대한 종교의 핵심은 궁극 실체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변화의 체험이며 이러한 변화의 체험 때문에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새로운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하는 것으로 본다. 나 중심이던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종교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오강남 : 세계종교 둘러보기≫
◆ 이 글을 쓴 이유가 종교를 가진 사람을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잘못된 믿음(맹목적인 믿음)이 얼마나 큰 파문을 가져오는지 알려주기 위해서다. 21세기 우주를 여행하고, 달에 정착하기 위해서 우주선을 발사하는 시대에 지구에서 본 하얀 토끼가 달에서 아직도 방아를 찧고 있다고 확신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에 의해서 일어난 불행한 계엄선포를 보면서 화가 난다. 70년 동안 민주화 만들기 위해서 우리 국민이 얼마나 피 흘리고 노력했는데,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는 부부가 누구보다 이성적이어야 하는 사람들이 침을 뱉어 어디로 가야 할 방향을 정하는 우연보다 더 못한 맹목적 미신에 사로잡혀 행동했다는 것이 이 나라의 국민으로서 정말 수치스럽고 부끄럽다. 한나라에 정치인이라면 어떤 정책을 펼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인 철학적 자세 (자신의 삶과 국가의 운명 들여다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누구를 위해 정치하는가? 오늘 묻고 싶은 질문이다.
나는 종교인이 아니다. 그렇다고 종교인 모두를 비판하거나, 종교에 의지하는 자를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맹목적으로 매몰되어 있는 종교인과 그들을 이용하는 종교지도자(목사, 신부, 무당, 스님 등)를 혐오한다. 지배당하는 쪽은 무지하거나 욕망에 함몰된 자며, 지배하는 쪽은 간교하고 이 또한 신이라는 이름을 빌려 자신의 욕망에 채우는 자이다. 인간은 동물 중에 가장 나약한 존재이다. 구석기시대로 돌아가 불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면 인간은 동물의 먹잇감이 되거나 질병과 자연 기후에 생존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나약한 존재 인간이 의지하고 싶은 것은 ‘신’에게 죽음과 질병과 재난으로부터 보호받기를 열망했을 것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에게도 이러한 열망은 사그라지지 않았으며, 외롭움과 고독함 느끼고, 생각하는 인간에게 의지하고픈 대상으로‘신’을 찾는다. 인간의 지상에 존재하는 신은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신으로 철학적인 자세로 신을 맞이해야 한다. 즉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지침으로 보다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야 한다. 삶과 신앙의 본질은 나의 존재이다. 신의 대리인인 그들을 위해 움직이는 존재가 되지 말고, 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믿는 자의 길이다. 신앙이 없는 자는 철학적 질문과 의문을 알도록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참고서적 :
조지 프레이저: 황금가지
도스토예프스키 :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리처드 도킨스 : 눈먼 시계공
오강남 : 세계종교 둘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