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남 평양에서 태어나 1935년 만주로 건너갔다. 1936년에는 일본으로 가 고학생으로 교토와 도쿄에서 여러 중학을 다니다가 니혼 대학에 적을 두기도 했다. 1949년 《연합신문》에 「얄궂은 비」를 발표하고, 1952년 「공휴일」, 1953년 「사연기」를 『문예』지에서 추천받으면서 등단한다. 1972년에 일본인 아내와 도일한 이후의 행적은 노출되지 않고 있다. 한국의 전후 소설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는 그의 소설에는 세계에 대한 절망을 지닌 인물들에 대한 반어적 태도가 잘 드러난다. 주요 작품으로는 「비 오는 날」, 「미해결의 장 : 군소리의 의미」, 「인간동물원초」, 「잉여 인간」 등의 단편소설과 『유맹(流氓)』 등의 장편소설이 있다.
손창섭은 1950년대 한국문학이 낳은 최고 스캔들의 주인공이며, 전쟁 뒤의 참혹한 가난과 부조리 등에 의해 철저하게 모독당한 개별자의 삶을 통해 인간 모멸이라는 주제로 기념비적인 전후문학을 빚어낸 거장이다. 그가 한국에서 갑자기 자취를 감춘 것은 1972년경이다. 그는 일본으로 잠적한 뒤 한국 문단과 완전히 소식을 끊어버렸다. 그와 소통이 끊긴 뒤 문단에는 무성한 소문만 난무했다. 한때 일본에 귀화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그는 한국 국적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생계는 일본정부의 보조금과 아내가 벌어들이는 돈으로 해결한다.
손창섭이 돌연 절필을 하고 일본으로 건너간 까닭은 명확하지 않다. 한 가지 설득력 있는 이유를 떠올린다면 소설 창작에 매달리느라 너무 지쳤으리라는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다른 수입이라곤 없이 오직 원고료에 의지해 살았는데, 그 원고료의 수준이라는 것이 턱없이 낮아 늘 허덕이는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또 한 가지 이유로 5·16 이후 군사 정권 아래서 다시 만연한 기득권층의 타락과 부패에 대한 환멸을 꼽는 사람도 있다. 손창섭은 한때 안양 부근에서 파인애플 농장을 운영했는데, 당시 파인애플 소비자의 대부분은 우리 사회의 부유층이었다. 말하자면 현실에 대한 포괄적 환멸과 ‘타락한’ 계층을 상대로 장사하는 자신에 대한 염증을 이기지 못해 파인애플 농장을 걷어치우고 일본으로 가버렸다는 것이다. 일본으로 건너간 뒤 그는 일체의 원고 청탁에 응하지 않고, 한국 사람과 만나려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