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에 읽는 책
점점 무더워 지는 여름입니다.
끈끈한 습기가 몰고 온 열기가 시원한 바다와 산을 그리워하게 하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나무숲이나 강가에 누워 하루 종일 내내 ‘책’을 읽고 싶기도 합니다.
불어오는 풀냄새, 하얀 파도,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 새소리, 하얀 구름, 산들거리는 나뭇잎, 시원한 바람, 이런 향연 속에서 낮잠을 자다가 다시 펼쳐보는 책. 그대로 한여름의 그림 같은 풍경일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새로운 규범을 찾아서(19세기 후반)를 읽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읽는 속도가 빨라 다음 주 중으로 다 읽을 것 같습니다.
많은 이들에게 권하고 싶고 선물하고 싶은 책입니다.
저희 독서모임에서 읽은 6월 7월 책입니다.
창가의 토토
지은이 : 구로야나기 테츠코 출 : 프로메테우스
어른이 읽는 어린이 동화입니다. 토토의 자유분방한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어야 되는지? 토론했습니다. 토토는 행동과잉장애을 앓고 있는 어린이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토토는 정상적인 학교 생활을 할 수 없어 몇 군데 학교에서 퇴학을 당합니다. 고바야시 교장 만나면서 토토의 활기찬 행동들은 이해 받기 시작합니다. 교장선생님의 독특한 교육철학과 토토 (작가 자신)의 성장 이야기입니다.
현대 정신 행동학으로 보자면 토토처럼 행동과잉장애는 있는 아이들이 상당히 많다고 합니다. 대부분 행동과잉은 청소년시기가 되면 사라진다고 합니다. 자신의 자녀가 행동과잉이 아닌가? 너무 조바심 내지 말고 어린이다운 특징이라고 이해해주면 훨씬 빨리 극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어린시기에 행동에 대한 지나친 억압은 오히려 나쁜 결과를 초래 할 수도 있습니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은 한번 읽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어린이만이 진화의 과정에서 야만성을 잃지 인았다고 하더군요.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야만성을 상실해 가는 과정인가도 모릅니다.
버락 오바마 담대한 희망
(새로운 미국에 대한 전망과 모색)
지은이 : 버락 오바마 출판사 : 렌덤하우스
오바마 자신의 정치적 가치와 이상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는 책입니다.
1장(공화당과 민주당)부터 4장(정치)까지는 읽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정치사라 읽기도 힘들며, 이해한다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물론 재미도 없었고요. 5장-9장 기회, 신앙, 인종, 국경너머 세계, 가족을 읽었습니다. 회원 다수 또한 5장부터 읽어 왔더군요. 생각보다 책이 흥미롭지 않았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정치에 대한 생각 ‘신념 무엇이며 그 신념이 그냥 생각에 그치지 않고 행한다.’는 실천하는 민주사회를 보면서 미국 사람의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이 부러웠습니다.
사실 미국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저에게 이 책은 미국사회에 대한 민낯을 본 것 같았습니다. 미국사회의 문제점을 부각시켜 놓은 정치적 현실. 곧 삶의 일부를 들여다봤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정치가 위에서부터 가진 자의 권력을 대변했다면 오바바의 정치관은 소수와 약자를 밑에서부터 실현하고 싶은 이상을 현실정치에서 이룩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회는 더 크게 변화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소수자 동성애 결혼찬성, 기독교 교리에 대한 유연함, 소수민족과 흑인사회에 대한 이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이해와 개선방향등 문제점과 해결 대한 의지 알 수 있었습니다.
오바마 자신의 담대한 희망이 미국사회의 희망이며, 오바마의 생각으로부터 희망의 발걸음이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미국 사회와 라띠노 (영화추천 : 노예 12년)
미국에서 라띠노는 최대의 소수자 집단으로 자리잡고 다양한 영역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2010년 인구 센서스에 의하면 라띠노는 미국 인구 수 309,342,689명의 약 16.4%(50,729,570)를 차지한다. 2000년 조사에서 라띠노 인구가 12.5%에서 2010년 15,525,090명이 증가해 미국에서 늘어난 인구수의 55.6%를 차지한다.
2010년 라띠노 전체 인구의 평균 나이는 27세이고 비 라띠노 백인의 경우 42세이다. 현재 라띠노 인구가 가장 많이 자리 잡고 있는 주는 캘리포니아 14,091,992. 텍사스 9,533,031. 플로리다 4,253,268, 뉴욕 3,434,485 순이고 각 주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37.7%, 37.7%, 22.6%, 17.7%에 달하고 있다. 인구수와 상관없이 라띠노 비율이 가장 높은 주는 뉴멕시코 주로 46.5%에 이른다. 이렇게 증가한 인구 규모에 따라 라띠노의 영향력은 정치 영역뿐만 아니라 대중문화, 사회, 경제등 모든 영역에서 강화되고 있으며, 미국의 국가 정체성을 변화시키고 있다. 2012년 3월 타임지 표지 기사 제목이 ‘내가 결정한다’ 인 것처럼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라띠노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영향력에 관심 역시 늘어났다.
미국 내 최대 선거인단을 보유하고 있는 캘리포니아, 텍사스, 플로리다뿐만 아니라 미 대선의 승부를 결정한다고 할 수 있는 부동층에서 라띠노 인구의 증가는 장차 미국 대선과 정치를 결정하는 주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따라서 라띠노의 지지를 얻기 위한 공약들과, 대통령 후보가 에스빠냐 어를 사용하면서 등장하는 에스빠냐 어 정치 광고가 엄청나게 늘고 있다. 미국 대선에서 라띠노가 누구를 지지할 것인지에 쏠렸다. 라띠노의 영향력은 정치적인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국 일상생활의 결을 바꾸고 있다. 따라서 라띠노에 대한 다양한 이해는 미국 사회의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는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라띠노의 등장
역사 속에 에스빠냐 제국은 우리가 라틴 아메리카로 통칭하는 식민지 외에도 광대한 식민지를 개척했다. 플로리다, 도미니카 공화국 동쪽 섬, 필리핀, 그리고 캘리포니아에서 아르헨티나 빰빠스까지 광대한 지역 에스빠냐의 세력 범위 안에 있었다.
메이플라워호가 청교도들을 싣고 미국 땅에 도착하기 훨씬 이전에 에스빠냐 사람들은 종교나 개척을 목적으로 플로리다, 애리조나, 뉴멕시코, 텍사스, 캘리포니아 지역의 여러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1565년 플로리다에 산 아구스띤 정착지를 만들면서부터다. 텍사스 지역을 둘러싼 미국과 메히꼬(멕시코)의 갈등이 전쟁으로 번진 메히꼬 전쟁(1846-1848)에서 메히꼬가 패하고 맺은 구아달루뻬 이달고 조약의 결과 네바다, 유타, 뉴멕시코, 애리조나, 콜로라도 지역이 헐값에 미국으로 넘어가고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메히꼬 사람들 중에서 약 75,000명이 미국 국적을 선택한 것이다. 메히꼬 영향력 아래 있었던 이 지역들은 하루아침에 미국의 영토가 되었고 에스빠냐 어 사용자들이 미국 시민이 되었다. 각자 살던 지역에 따라 메히꼬인, 텍사스인, 캘리포니아인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다.
메히꼬 영토였던 텍사스가 1836년 독립선언하고 1845년 미국 텍사스병합으로 양국은 전쟁을 하여 이 전쟁에서 메히꼬가 패하게 되면서 지금의 메히꼬 영토의 2배에 해당하는 136만km2를 1,500만 달러라는 가격에 미국에 넘기게 된 것이다. 미국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미국의 남서부지역에서는 메히꼬계 인구가 많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메히꼬 문화 전통 역사를 유지할 수 있었고 이것이 라띠노 집단의 문화적 특징이 되었다.
메히꼬인들의 경우 메히꼬 혁명시기의 정치적 혼락을 피해 이주하거나,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미국내 철도, 광산, 농장 등에서 필요로하는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대규모로 이주했다. 미국과 에스빠냐 전쟁의 결과로 미국의 영향권에 편입된 뿌에르도 리꼬(도미니카 공화국)의 경우도 대규모 이주가 진행된다.
뉴올리언스
루이지애나주(州)의 최대 도시로 미시시피강 어귀에서 160km 상류에 위치한다. 도시 대부분의 지역이 해수면 보다 낮고 저습한 삼각주로, 홍수나 허리케인의 피해를 종종 입어 왔다. 2005년 8월 29일 멕시코만을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영향으로 도심의 80%가 물에 잠겨 천 명이 넘는 사상자와 백만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이 도시는 1718년 프랑스의 루이지애나 총독에 의해 설립되어, 프랑스식민지의 중심지로 번영하였다. 1764년 에스파냐령이 되었다가 1803년 다시 프랑스령이 되었다.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에 의하여 미국의 영토가 되었고, 1849년까지 주도(州都)로 있었다. 그런 이유로 현재도 프랑스식민지시대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으며, 재즈의 발상지, 매년 2월에 열리는 마디그라 축제로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어 매년 1000만여 명의 관광객들이 찾는 관광도시
참고서적 : 라틴 아메리카 문화의 즐거움
피렌체의 빛나는 순간
(르네상스를 만든 상인들)
지은이 : 성제완 출 : 문학동네
르네상스 이룬 상인들의 역할과 예술을 통한 가문과 교황청의 욕망 속에서 피어난 피렌체의 작품 배경과 위대한 미술가들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르네상스 미술의 특징 보다는 바르디, 스트로치, 브란카치, 메디치, 코시모 데 메디치 가문을 통하여 미술가와 미술사가 발전하는 계기는 무엇이며 예술을 통해서 그들이 원하는 했던 것이 순수 예술에 대한 사랑보다는 권력에 대한 욕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우리 일반 독자들은 르네상스 미술가 조토, 다빈치, 마사초, 보티첼리, 라파엘, 미켈란젤로 등이 미술적 혁명을 실현한 위대한 예술가로의 접근 했으며 그들이 무엇을, 왜? 그 그림과 건축, 조각을 해야만 했는가에 대한 질문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위대한 그림 뒤 배경에 숨어 있는 의도는 그림의 아름다운 장면과는 거리가 먼 것을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가문의 기도실과 시신 안장 묘실, 성당의 그림과 건축을 통하여 ‘신’ 옆에 앉아 신과 같은 영광과 권세를 받고 영생을 누리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예술을 통하여 완결되는 모습을 현대인의 눈으로 본다면 사악 합니다. 그러나 그 세대의 관념은 그들의 문화이며 문화는 점진적 진보를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 세대의 문화를 읽는다는 것은 찬사를 받는 위대한 예술가들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저자는 색다른 미술보기를 경제의 권력 속에서 찾아냅니다. 아마 경제의 눈을 통해서 저술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종교권력과 중세가문과 토착가문, 신흥가문의 치열한 권력 다툼 속에서 누가 더 신 가까이에서 신의 은총을 받는 자로 탄생하여 가문의 전설과 신화를 쓰고 싶은 욕망이 르네상스 속에서 피어납니다.
욕망은 아름답지 않지만 그 밑바탕에 위대한 작가들의 예술의 의지가 빛나게 되는 피렌체 도시 탄생을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시민 공동체를 중시하는 가치관 유언 (메디치 가문 : 조반니)
나는 토스가나 지역의 다른 상인들보다도 더 큰 사업을 남긴다. 선하고 훌륭한 시민들을 존경하는 일에서 즐거움을 찾으면, 시민들은 우리 가문을 그들의 안내자로서 빛날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만약 네가 조상들의 전통에 신뢰를 가진다면 사람들 또한 너를 명예롭게 생각할 것이다.
이를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가난한 자들에게 자선을 베풀고 불쌍한 자들에게 친절하고 자애롭게 대하며, 너 자신을 내바치고 성심을 다해 그들을 역경에서 구해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들이 사악한 일을 행하려 하지 않는 한, 절대 사람들의 의지를 꺾으려 하지 말거라! 조언을 주려고 하기보다는, 공정하고 올바른 이유를 들어 문제들을 논하라. 궁에 자주 들르지 말고, 부를 때까지 기다리고 순종하며, 많은 표를 얻었다 하여 자만에 취하지 마라. 사람들이 평화 속에서 살도록 보살피고 도시의 상업을 증진시키려 노력 하거라.
소송이나 공정성에 영향을 미치는 어떠한 시도도 해서는 안 된다. 정의를 방해하는 자는 누구든 정의에 의해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너에게 어떠한 얼룩도 남기지 않으며, 어떠한 악행도 스스로 저지른 바가 없다. 그러므로 나는 오명이 아닌 영광을 너에게 유산으로 남긴다.
피펜체 미술사를 움직인 조토, 마사초,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조토 디 본도네 (1267-1337)
미술사 책에서는 조토와 더불어 새로운 장을 시작하는 것이 통례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 위대한 화가의 출현으로 완전히 새로운 미술의 기원이 시작되었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의 역사에 있어서는 새로운 장이나 새로운 시작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조토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은 벽화 즉 프레스코들이다. (프레스코라는 명칭은 벽에 바른 석고가 채 마르지 않은 젖어 있을 때에 그림을 그린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신앙 ; 두루마리를 든 여인상으로 신앙의 화신이다.
이것은 조각이 아니다. 이것은 환조 같은 느낌의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그림이다. 우리는 팔의 표현에서 단축 법을, 얼굴과 목에서는 입체적 표현법을 글리고 의사의 흐르는 듯한 주름에서 깊은 그림자를 볼 수 있다.
천년동안 이와 같은 것이 만들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조토는 평평한 평면에서 깊이 감을 느끼게 하는 기술을 재발견한 것이다.
조토는 단순히 자신의 기교를 과시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로 하여금 회화의 개념 전체를 변경하게 만들었다. 그는 그림으로 기록하는 수법을 쓰지 않고 그 대신에 성경 이야기가 바로 우리의 눈앞에서 전개되는 것과 같은 환영을 창조해낼 수 있었다.
파도바에 있는 조토의 프레스코 벽화 (그리스도를 애도함)
주제는 성모마리아가 그녀의 아들을 마지막으로 포옹하며 그 주위를 둘러싸고 사람들이 예수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다. 그는 모든 인물이 그 페이지에 다 들어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인물들의 크기를 다양하게 만들었다.
실제 사건을 보고 있는 느낌을 받게 된다. 두 팔을 옆으로 벌린 채 몸을 앞으로 구부리고 있는 성요한의 열정적인 움직임. 인물과 인물 사이의 거리 그들 모두가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감지하게 한다. 얼굴이 가려져서 보이지 않고 움츠리고 있는 사람들조차 똑 같이 슬퍼하고 있음을 비극적 장면의 슬픔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지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기독교 미술이 이야기를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의 모습이 완전히 보여야 한다는 고대 오리엔트의 미술 개념이다. 조토는 그러한 미술 개념을 다 무시했다.)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파렌체 대성당의 돔 1420-36)
브루넬레스키는 피렌체 대성당을 완성시키는 일을 맡고 있었다.
고딕 성당으로 고딕 전통의 일부를 형성하는 기술적인 창안에 대해서는 충분히 터득하고 있었으나 궁륭형 천장을 만드는 고딕 식 방법을 알지 못했으면 불가능했을 구성과 설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돔을 완성시키는 방법을 고안해낼 때까지 이 돔을 받쳐주는 기둥들 사이의 거대한 공간을 덮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부르넬레스키는 새로운 교회나 다른 건물을 설계 용청 받았을 때 전통적인 양식들을 모두 다 버리고 로마의 영광이 부활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의 시안을 채택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로마를 여행하며 신전과 궁전의 유적들을 측량하고 건물들의 형태와 장식들을 스케치했다고 한다. 모방의 의도는 아니었으며 고전 건축의 형식들을 새로운 조화와 미를 창조하는 데 자유로이 이용하는 것이었다.
브루넬레스키의 업적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그의 계획을 실제로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그 뒤로 500년 가까이 유럽과 미국의 건축가들은 그의 발자취를 따랐다.
현대 건축되고 있는 대부분의 주택들 원주나, 장식, 건물, 문, 창틀의 쇠시리장식, 건물의 치수와 비례 등에서 고전적 형식의 잔재를 찾아 볼 수 있다.
블루넬레스키는 미술 영역에서 또 하나의 획기적인 발견을 한다. 수백 년간 미술을 지배했던 원근법의 발견은 그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한다. 단축법을 이해했던 그리스 미술가들이나 공간의 깊이를 능숙하게 표현했던 헬레니즘 미술가들조차 물체가 뒤로 물러갈수록 수학적인 법칙에 따라 그 크기가 작아진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고전기 미술가 중에 가로수가 늘어서 있는 길이 지평선상의 한 점으로 사라지게 그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마사초(어줍은 톰마소 :세상 물정에 어두워 어수룩하고 겉모습에 무관심하며 얼빠진 행동을 자주해서 붙여진 별명1401-28) : 성 삼위 일체, 성모 성 요한과 헌납 자들
그는 대단한 천제임에 틀림없다. 28살이 되기도 전에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회화에 있어서 완전한 혁명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섬세한 우아함이 아니라 큼직하고 육중한 인물, 유려한 곡선이 아니라 건장하고 모가 진 형상, 꽃과 보석 같은 고상한 세부 묘사 대신에 유해를 안치하는 황량한 지하 납골소 거기에는 훨씬 더 진지하고 감동적인 것이 있었다.
마사초가 인물들을 원근법적인 틀 아래 배치함으로써 강조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런 효과였다. 손으로 그들을 만져볼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
조각가인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가 경영하는 유수한 공방에서 도제 수업을 받았다.
레오나르도의 정신력은 범인들에게 항상 경의와 감탄의 되고도 남을 천재였다.
그의 제자들과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보존해둔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그의 스케치북과 노트북을 보면서 그의 정신 범위와 그 엄청난 생산성에 놀라게 된다. 그 속에는 그가 쓴 글과 소묘, 그가 읽을 책에서 발췌한 글들 , 쓰려고 했던 초고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것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어떻게 한 인간이 각기 다른 연구 분야에서 이토록 탁월할 수 있으며 거의 대부분의 분야에서 중요한 공헌을 할 수 있었는지 점점 더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아마 레오나르도가 교육받는 학자가 아니라 피렌체의 미술가였다는 데 있을 것이다.
미술가의 임무는 더 철저하게 그리고 더 열정적으로 더 정확하게 눈에 보이는 세계를 탐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셰익스피어와 마찬가지로 라틴어와 그리스어는 전혀 몰랐다. 레오나르도는 자기가 읽는 것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문제에 부딪치게 되면 권위자들에게 의지 하지 않고 언제나 그것을 실험으로 해결하였다. 30구 이상의 시체를 해부해서 인체의 비밀을 탐구하기도 했으며, 자궁 속에 태아가 성장하는 신비를 조사한 최조의 사람이기도 했다. 파도와 조류의 법칙을 연구했으며, 곤충들과 새들이 나는 것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데 수년을 보내고, 언젠가는 현실리라고 확신한 비행기구를 고안하기도 했다. 바위와 구름의 형태, 멀리 있는 물체의 색채에 미치는 대기의 영향, 초목이 성장하는 것을 지배하는 법칙들, 음의 조화 등 그의 끊임없는 연구의 대상이었고 이것이 그의 예술의 기초가 되었다.
군주와 장군들은 이 놀라운 미술사를 성채와 운하의 건설, 새로운 무기와 장치를 만드는 군의 기사로 등용하고자 했다. 한가할 때 그는 자신이 발명한 작동하는 장난감을 가지고 무대 공연과 구경거리를 위한 새로운 장치로 그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레오나르도가 그의 저술한 것을 한 번도 출판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저작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왼손잡이였으므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을 써서 그의 글은 거울을 통해서만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견해가 이단으로 몰릴 것을 두려워하여 그의 발견들을 남에게 밝히기를 꺼려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글 가운데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웃날 갈릴레오가 주장했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예견했음을 보여준다.
그에게 있어서 자연에 대한 이 모든 탐구는 그의 미술에 필요한 가시적인 세계에 관한 지식을 얻고자 하는 수단이었다. 그는 그의 미술을 과학적인 토대위에 올려놓음으로써 그가 사랑하는 회화 예술을 비천한 기술로부터 존경받는 신사다운 작업으로 변경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작품의 완성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고 주장하고 그가 작품에 만족하지 않으면 작품을 내놓기를 거절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의 작품 중에서 완성된 것이 별로 없다.
최후의 만찬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 수도원 식당으로 사용하던 긴 홀의 벽화로 그려진 것이다.) ; 이처럼 실감나게 그려진 적은 일찍이 한 번도 없었다. 식탁위에 떨어지는 빛은 인물들의 입체감을 살려준다. 식탁위에 있는 접시나 의상의 주름 등의 모든 세부가 실감나게 묘사된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가 어떤 방식으로 성경 이야기를 끌고 가는지 눈을 돌렸을 것이다. 이 그림에는 동일한 테마를 다룬 이전의 그림들과 닮은 데가 하나도 없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 예수의 말이 야기한 흥분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에는 혼란한 구석이 하나도 없다.
12사도들은 제스처와 움직임에 의해서 서로 연결되는 세 사람씩 네 무리로 자연스럽게 구별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변화 속에는 너무나 풍부한 질서가 있으며 이 질서 속에는 너무나 다양한 변화가 내재해 있으므로 하나의 움직임과 그것을 받는 움직임 사이의 조화를 이룬 상호 작용을 살펴보려면 끝이 없다. 레오나르도는 윤곽을 만족스럽게 표현하기 위해 소묘의 정확성이나 정밀한 관찰을 희생시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행위와 반응에 대한 레오나르도의 깊은 통찰력과 우리 눈앞에 한 화면을 생생하게 전개시켜 보여준 그의 상상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모나 리자(피렌체의 한 부인의 초상)
우리를 먼저 감탄하게 하는 것은 리자라는 인물이 놀라운 정도로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우리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그녀의 마음속에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우리의 눈앞에서 변하여 볼 때마다 달라 보이는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그 이전의 어느 누구보다도 사람들의 눈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화가는 보는 사람에게 무엇인가 상상할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 윤곽을 그처럼 확실하게 그리지 않고 형태를 마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것같이 약간 희미하게 남겨두면 이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인상을 피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레오나라도의 창안으로 이탈리아 어로 “스푸마토”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의 형태가 다른 형태 속으로 뒤섞여 들어가게 만들어 무엇인가 상상할 여지를 남겨놓는 희미한 윤곽선과 부드러운 색채를 가리킨다.
레오나르도가 부드러운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게 함으로써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남겨둔 부분들이 바로 입과 눈 부분이다. 얼굴을 그리거나 낙서를 해본 사람이라면 우리가 표정이라고 부르는 것이 두 가지요소 입 가장자리와 눈 가장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림의 양쪽이 꼭 들어맞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제일 분명하게 보이는 곳은 배경에 있는 환상적인 풍경화이다.
왼쪽의 지평선은 오른쪽의 지평선보다 훨씬 낮은 곳에 있는 것같이 보인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가 그림의 왼쪽에 초점을 맞추면 오른쪽에 초점을 맞출 때보다 인물이 약간 더 커 보이거나 혹은 몸을 더 세우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그녀의 얼굴 또한 보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서 변하는 것같이 보인다. 왜냐하면 얼굴의 양면이 꼭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옛날 사람들은 두려움을 가지고 초상화를 보았다. 왜냐하면 미술가가 형상을 보존함으로써 그가 묘사한 사람의 영혼을 보존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위대한 과학자인 레오나르도는 태초의 형상 제작자들의 꿈과 두려움을 현실로 만들었다.
미켈란젤로 (13살 피렌체의 지도적인 화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공방에 들어가 3년간 도제 생활을 함.)
소년 미켈란젤로는 그의 공방에서 작업에 필요한 모든 기술적인 수법과 프레스코 벽화를 그리는 확고한 기법 및 소묘의 철저한 기초를 모두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기를란다요의 안이한 방법을 배우는 대신 조토 마사초 도나텔로와 같은 대가들의 작품과 메디치 가의 소장품을 본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 작품들을 연구하기 위해 공방을 나왔다. 그는 근육과 힘줄을 가지고 움직이는 아름다운 인체를 표현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고대 조각가들의 비법을 깨닫고자 하였다.
레오나르도와 마찬가지로 해부학의 법칙을 고대 조각만을 통해서 배우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시체를 해부하고 모델을 보고 직접 소묘하며 인체의 비밀을 모두 알 때까지 인체 해부학에 관해 연구를 계속했다.
그의 집중력과 기억력은 대단히 탁월했으므로 얼마 안가서 그리기 어렵다고 생각되는 자세나 동작은 하나도 없게 되었다. 그는 30살이 될 무렵 천재 레오나르도와 필적할 수 있는 당제의 뛰어난 거장들 중에 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피렌체 시는 그와 레오나르도에게 시의회의 대회실 벽면에 피렌체 시의 역사와 관련된 일화를 그려줄 것을 의뢰하였다. 두 거장들이 명예를 걸고 경쟁한 겻은 미술사에 있어서 전무후무한 극적인 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피렌체 시민들이 흥분 속에서 그들의 밑그림과 준비 작업의 진척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작품은 완성되지 못했다. 레오나르도는 밀라노로 돌아갔으며,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미켈란젤로를 그를 로마로 초청하여 기독교 세계의 대왕에 상응하는 자신의 영묘를 세우게 했던 것이다.
교황 식스투스 4세가 지은 시스티나 채플이라는 작은 예배당이 있었다.
교황은 미켈란젤로에게 그 천장에 그림을 그려 넣을 것을 제안했다. 그는 자신이 화가가 아니라 조각가라고 변명하기도 했다. 이 달갑지 않은 주문이 적들의 음모에 의해 그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교황이 완강하게 버티자 그는 할 수 없이 벽감들 속에다 12사도들을 그려 넣은 아주 간단한 설계에 착수했다. 피렌체에서 그림 그리는 것을 도와줄 조수들을 불러 고용했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예배당 안에 혼자 틀어박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전 세계를 놀라게 할’ 계획을 혼자서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미켈란젤로가 교황청의 한 예배당 안의 받침대 위에서 4년간의 고독한 작업 끝에 이룩해놓은 것을 보면 한 개인이 그만한 것을 성취할 수 있었는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천장화이므로 미켈란젤로는 등을 바닥에 대고 누워 위를 쳐다보고 그림을 그려야 했다. 실제로 그는 비좁은 공간에서의 자세에 익숙해져서 이 시기에 편지를 받아도 그것을 머리위에 쳐들고 몸을 뒤로 체치고 읽었다고 한다.
항상 새롭고 풍요로운 착상들 그리고 세부를 묘사하는 정확한 솜씨와 그 비전의 장대함은 인류에게 천재의 능력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예배당은 낮은 궁륭 천장을 가진 대단히 크고 높은 강당처럼 생겼다. 선배들이 전통적인 수법으로 그린 모세와 예수에 관한 이야기의 그림들이 들어서 있다. 그러나 천장은 쳐다보면 완전히 다른 세계를 보게 된다.
미켈란젤로는 예배당 양족 벽에 5개 창문 사이에서 시작되는 궁륭천장에 유태인들에게 메시아의 출현을 예언하는 구약성서의 예언자들과 그 사이사이 이교도들에게 예수의 재림을 예언했다고 전해지는 무녀들의 거대한 그림을 그려 넣었다. 예언자와 무녀들은 깊은 사색이 잠겨 있거나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논쟁을 하거나 그들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듯 한 형상들을 하고 있는 초인간적인 남녀의 상으로 표현한다. 큰 인물상이들 열지여 있는 사이의 천장 꼭대기에는 천지창조와 노아의 홍수 수많은 인물상들을 그려 넣었다. 그는 무한히 다양한 남녀의 모습을 끝없이 이어놓는데, 성경 속에 열거된 예수의 조상들을 그린 것이다. 이처럼 많은 인물상들을 보면 천장 전체가 혼란스럽고 균형이 잡히지 않았으리라고 의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스티나 예배당 안으로 들어서서 그 천장화를 단순히 하나의 훌륭한 장식으로만 생각하고 본다면 그것이 얼마나 단순하고 조화로운지 전체의 짜임새가 얼마나 명료한지를 발견하고 대단히 놀라게 될 것이다.
이 놀라운 인물상들은 미켈란젤로가 어떤 자세든지, 어떤 각도에서든지 인체를 능수능란하게 그리는 탁월한 솜씨를 보여준다. 그가 그린 창세기 이야기 중 가장 유명하고 뛰어난 것은 하나에 그려진 (아담의 창조)이다.
죽어가는 노예 : 생명력이 막 꺼지려 하고 육체가 죽음의 지배를 받게 되는 순간을 선택했다.
박물관에 있는 원작 앞에 서 보면 그것이 차갑고 생명력이 없는 조각 작품이라고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이 조각상은 우리 앞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한 편안하게 쉬고 있는 것같이 보이기도 한다. 조각한 인체들이 격렬하게 몸을 뒤틀고 돌리고 있다 해도 전체적인 윤곽은 학고하고 단순하고 안정되어 있다.
미켈란젤로는 그가 작업을 하고 있는 대리석 속에 인물들이 숨어 있다고 생각 했으므로 조각가로서 그가 해야 할 일은 단지 그들을 덮고 있는 돌을 제거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율리우스 2세가 죽자 다른 교황이 그의 봉사를 요구해왔고, 그 뒤를 이른 교황들도 더 열렬히 자신의 이름을 미켈란젤로 이름과 연결시키고자 열망했다. 그는 존경을 받기도 하였지만 그의 성질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두려움을 사기도 했다. 그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가차 없이 대했다.
77세 때에 이탈리아인이 ‘조각가 미켈란젤로 앞’이라고 표자를 썼다고 그 편지 받기를 거절했다고 한다.
여기서 “나는 단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로 통하고 있으니까……. 나는 공방을 경영하고 있는 화가나 조각가인 적인 한 번도 없소……. 내가 교황들에게 봉사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강압에 의한 것이었소”
브라만테가 미완성으로 남겨놓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 둥근 지붕을 씌우는 일을 맡았던 최후의 거창한 작업에 대한 보수는 거절했다. 당시 사람들이 그을 ‘신과 같은 사람’이라고 불렸다.
라파엘로 산티(1483-1520 우루비노라는 작은 도시에서 피렌체로 왔다.)
‘움브리아 파’의 지도자 피에트로 페루지노의 공방에서 가장 촉망받는 제자였다.
라파엘로는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영향력 있는 후원자들의 마음에 들 수 있었다. 그는 선배 거장들을 따라잡을 때까지 쉬지 않고 작업했다.
미켈란젤로가 묘사한 조물주가 신의 진정한 모습으로 만인에게 각인되었듯이 라파엘로가 그린 성모상도 후대들에게 성모의 진정한 모습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대공의 성묘 : 이 그림에서 보이는 외견상의 단순함은 깊은 생각과 세심한 계획, 엄청난 예술적인 지혜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입체감 있게 묘사되어 어둠 속으로 물러나는 성모의 얼굴, 자연스럽게 늘어트려진 옷자락 속에 싸인 육체의 볼륨,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의 학고하고 애정어린자세 등 모든 것이 완벽한 균형의 효과에 기여하고 있다. 이 구도에는 간장감이라든지 부자연스러운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다. 마치 이것 이외의 다른 모습으로 태초부터 그렇게 존재했었던 것같이 보인다.
요정 갈라데아 : 피렌체의 시인 안제로 폴리치아노의 시에서 주제를 따왔는데, 그 시는 또한 보티첼리에게 영감을 주어 (비너스의 탄생)을 그리게 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 시는 못생긴 거인 폴리페모스가 아름다운 바다의 용정 갈라데아에게 사랑의 노래를 바치지만 그녀는 그의 거친 노래 솜씨를 조롱하며 두 마리의 돌고래가 끄는 수레를 타고 파도 위를 달려가고 바다의 다른 신들과 요정들은 즐거운 무리를 이루어 그녀의 주위로 모여드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림은 불안정하거나 균형을 잃지 않게 하면서 화면 전체에 끊임없는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있다. 인물들을 배치하는 이러한 탁월한 솜씨, 구도를 만드는 최고 극치에 달한다.
어떤 귀족이 라파엘로에게 도대체 그렇게 아름다운 모델을 어디서 찾아냈느냐고 물었다. 그는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어떤 생각’을 따랐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교황 레오 10세와 두 추기경 : 그의 후원자 메디치 가 출신인 교황 레오 10세가 두 사람의 추기경을 거느리고 있는 초상
머리가 약간 부풀어 오른 근시안인 교황의 초상에서 이상화된 것이 하나도 없다. 비로드와 비단의 다양하고 풍부한 색조들이 호사스러움과 권세의 분위기를 돋구어주나 이 사람들이 그렇게 편안한 상태는 아니었으리라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이 초상화가 그려진 때는 루터가 새로운 성 베드로 대성당의 기금 모금 방법에 대해 교황을 공격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교황 레오 10세는 이 건축사업의 책임을 라파엘로에게 맡겼다. 그는 건축가가 되어 교회를 설계하고 별장과 궁궐을 짓고 또 고대 로마 유적들을 연구하게 되었다.
라파엘로는 거의 모차르트처럼 젊은 나인인 38회 생일날 사망했는데, 당시 그를 추기경으로 만들자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여기는
생전에 어머니 자연이
그에게 정복될까
두려워 떨게 만든
라파엘로의 무덤이다.
이제 그가 죽었으니
그와 함께 자연 또한
죽을까 두려워하노라
참고서적 : 곰브리치
대담
지은이 ; 도정일. 최재천 출판사 : 휴머니스트
8월 여름방학 기간에 우리 독서모임에서는
대담을 읽기로 했습니다. 8년 전에 읽었던 책입니다. 인문학자와 과학자의 시선에서 너무나 감성적이거나 이성적인 문제를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평소 책은 많이 읽는 사람들도 과학적 시선이 너무 부족하여 매우 답답한 마음이 든 일이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 그런 사고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있습니다. 어떤 편견에 사로잡힌 일에서부터 과학적 사고 한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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