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책 이야기
세인트 헬레나
11월 가을을 아직 떠나지 보내지 못했는데, 하얀 눈이 내렸다.
겨울 김장을 준비하는 엄마들의 마음과 몸은 바쁘기만 하다. 일상의 생활은 꽉 짜여 여유로운 혼자만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 듯 보인다. 그러나 가까운 지인들의 삶으로 들어가 보면 그들은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민화를 그리거나, 민요를 배우거나, 퀼트, 꽃꽂이, 독서모임 등. 자신의 재능에 맞게 취미 생활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한없이 한가롭게 보이기만 한 이러한 취미 활동이 경제적인 면을 해결해주는 직업 된다면 자기를 실현해주는 즐거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취미 활동은 무언가 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시작하지는 않는다. 좋아하는 것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잘 할 수 있는 일이 되기도 하고, 직업으로 전환하기도 한다.
오랫동안 해 온 나의 취미 활동을 소개해 본다.
공부를 잘하는 것과 거리가 멀었지만 난 책 읽기를 좋아했다. 그렇다고 어린 시절부터 책을 읽은 것은 아니다. 가난한 농촌 마을에 살았던 나는 초등학교 6학년까지 동화책을 읽어보거나, 한 권의 내 책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시로 나가 중학교에 다니게 된 나는 큰 서재가 딸린 집을 방문하게 되었고, 책장 가득 꽂힌 책들을 처음 만난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빨간 머리 앤, 키다리 아저씨, 톰 소여의 모험 등 수많은 책이 내 눈 가득히 들어왔고, 그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세상의 크기가 작은 마을이 전부였던 시골아이가 책 속에서 만나는 미국, 프랑스, 영국, 아프리카 등. 여러 나라의 인물과 생활상은 신비롭고 매혹적이었다. 책은 키다리 아저씨를 만나길 꿈꾸게 해줬고, 제라늄 향기와 언덕 위의 하얀 집의 저녁 풍경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게 만들어줬다.
여고 시절은 한층 더 문학에 대한 갈망이 심해졌고, 국어 선생님은 소녀 감성 자극하며 프루스트의 가지 않는 길을 가르쳤으나, 나는 노란 숲속 두 갈래 길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망설임과 고민 없이 학교공부와 무관한 책 읽기에 열중했다. 대단한 문학소녀가 된 것인 양 가방에는 한두 권의 소설책과 비밀일기장이 학교 책보다 소중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피천득의 산호와 진주, 법정 스님의 서 있는 사람들, 안병욱의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등. 그 시절 에세이와 작은 문고판 고전과 젊은 작가들의 소설이 쏟아져 판매되었다. 문학은 소녀들을 충족시켰지만, 갈망의 대상이기도 하여 급기야 법정 스님을 만나려 순천 송광사를 찾아가는 일까지 생겨나기도 했다. 메밀꽃 필 무렵이면 봉평마을이 전라도에서 먼 강원도에 있다는 사실에 상심했다. 상상 속 봉평은 끊임없이 펼쳐진 하얀 소금밭 남게 되었다, 열병 앓이를 한 것 같은 문학에 대한 탐미도 스무 살이 넘어지자 직업전선에서 시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핸드백을 멘 가방끈 위로 알베르 카뮈와 에드거 앨런 포, 솔제니친 등. 책들을 늘 들고 다녔다.
1990년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있었고, 나는 아이들을 위해 책을 사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혀 세계명작을 읽고, 창작동화와 전래동화를 읽었다. 아이를 통해서 우리 역사를 공부했고, 과학도서와 세계위인들을 만났다. 중학교에 다니는 아이와 같이 단편 문학과 성장소설 읽으며, 아이처럼 독서도 성장하게 되었다. 나는 중학교 학부모 독서모임에 나가 일주일에 1번씩 한 권의 책을 읽고 토론식 독서모임에서 꾸준히 책 읽기를 했다. 모임의 형태는 달라졌지만, 지금까지 약 16년 동안 책 읽는 즐거움은 나의 삶의 일부가 되었고, 내 생애에 내가 선택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기도 하다.
당신은 책을 읽고 무엇이 되었나요? 부자가 되었나요?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나요?
사람들은 책을 읽으면 마치 책 속에서 잘 사는(돈 많이 버는 일) 방법을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책을 읽는다는 것은 꼭 무엇이 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다만 ‘나 자신이 되는 일이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알알이 들어와 박혀- 아이야 식탁엔 은쟁반에, 하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이육사의 청포도라는 시를 좋아했을 때와 알지 못했을 때 청포도 맛 차이는 크다. 음식은 맛으로 먹는 것이지만 우리 뇌는 상상과 기억이라는 물질로 맛을 자극하기도 한다. 나에게 7월의 청포도는 하늘 밑 푸른 바다와 흰 돛단배가 상상되고, 하얀 모시 수건이 아니더라도 하얀 식탁보를 깔고 먹어야 하는 포도이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하고 눈이 푹푹 날리고 나는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눈이 내리는 겨울밤 이 장면을 상상해보라! 얼마나 슬프고 아름다운 장면인가? 백석시인을 책에서 만나지 못했다면 눈 내리는 나의 겨울밤은 한없이 쓸쓸하고 긴긴밤이었을 것이다.
책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삶과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해준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백치『미시킨공작의 5분의 사형시간은 그에게 있어서 무한대의 시간이고 엄청난 재산처럼 여겨졌다고 그는 술회했다. 만약 생명을 다시 찾는다면……. 매 순간을 1세기로 연장해 아무것도 잃지 않고, 1분 1초라도 정확히 계산해 두어 결코 헛되이 낭비하지 않으리라. 때론 5분이 그 어떤 보물보다 더욱 소중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미시킨공작은 삶에 희망을 걸 수 없을 때 이미 영혼이 죽었다고 말한다. 인간에 대한 연민과 심장까지 꿰뚫어 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니체의 사상은 또 어떠한가? 자신의 의지 힘으로 다양한 충동을 잘 견디는 우아한 인간이 되라고 말한다. 다윈의 진화론은 생명의 다양성과 생성과정과 자연상태에서 생물과 동물이 환경에 어떻게 적응해나가는 생명의 신비를 가르쳐준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는 세계의 지리와 환경조건에 따라 문명발달 속도에 차이가 생겨났으며, 인간사회의 다양한 문명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알려 준다. 마빈 헤리스의 책들을 통해서 원시 문화에서 현대 문명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생활양식과 의식의 흐름의 기제들이 발달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책은 내가 경험할 수 없는 것을 간접으로 경험하게 해주고 사고하게 해준다. 다양한 삶을 살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넘는 방법은 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45년 만에 통화하게 된 초등학교 동창생은 나에게 작가 되었냐고 물어 왔다. 뜬금없는 물음에 화들짝 놀라 다시 왜냐고 물었더니, 어린 시절부터 내가 글쓰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보낸 기억에도 없는 내 편지를 몇 번 받았었고, 편지글에서 재능이 있는 것을 느꼈다는 동창생의 말을 들었다. 어쩌면 어릴 적 이런 취향들이 자연스럽게 책을 가까이하게 만들어 줬을 것이다. 취미를 가진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랫동안 한다는 것은 때론 아주 지루한 일이기도 하다. 어떤 작가는 책을 읽는 것을 지루한 장례식에 참석해 앉아있는 같다고 말했다. 그래도 나는 책 읽기가 좋다. 내가 하는 책 읽기는 그저 좋아서 하는 일이다. 나의 이런 책 이야기를 소개하고 싶었다. 나는 왜 책을 읽고 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은 충분했으리라 생각된다.
올겨울 지속 가능한 취미 생활로 생활 독서를 권해본다.
톨스토이, 세르반테스, 니체, 괴테, 도킨스, 마르케스, 올리버 색스, 버지니아 울프 등. 최고의 작가와 석학들이 당신의 친구로 가까운 도서관에서 서재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당신이 한 권의 책을 읽어 내려간 순간 위대한 작가와 대화를 하게 될 것이며, 그들의 책을 통해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삶의 지혜를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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