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공동체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저는 무신론자지만 종교사상을 따르는 이들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왜냐면 모든 종교의 교리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무엇으로 사는가?’의 철학적 물음에 불교, 힌두교, 이슬람, 기독교, 유대교 등 세계의 종교가 가장 근접한 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가 가지고 있는 속성 특히 기독교의 모든 것의 창조자이며, 모든 삶을 주관하며, 모든 죄를 용서한다는 이런 사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귀신, 마귀, 민간신앙의 조상혼령, 환생 등...) 이런 사상이 잘못된 설교자(목사)를 만날 경우 종교의 기능은 없어지고 신도들은 교회 속 세상에서 종교의 굴레에 빠져 들게 된다.
무엇보다도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죄와 벌’ ‘죄와 구원’ ‘지옥과 천국’을 하나님이라는 절대자의 대리자인양 권력을 남용하는 목사(교회)들을 비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신의 옆자리 앉아 자신이 무한한 축복을 받은 대리자가 되어 성경을 왜곡 하고 심약한자의 마음속에 뿌리내려 신도의 마음을 훔쳐 가정보다는 교회, 가정의 경제 보다는 교회 재단을 위한 헌금, 가정의 돌봄 보다는 교회를 위한 봉사를 요구하며 복종하게 만든다.
이런 형태는 모든 종교가 가지고 있는 속성 중 하나며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경우 종교적 노예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종교가 현실의 삶을 넘어 설 경우 종교의 기능은 없어지고 만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세르비아계와 보스니아계의 분쟁, 신교도 영국계와 아일랜드계 카돌릭교의 북아일랜드분쟁, 불교계 싱할리족과 힌두계 타밀족 스리랑카분쟁 ,파키스탄 이슬람과 인도 힌두교 캐슈미르분쟁 ,이슬람 다수파인 시아파 이라크와 소수파에 속하는 수니파 이란의 분쟁 등... 세계 곳곳에 종교분쟁이 끝없이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다. 종교의 교리와 어긋난 분쟁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다.
15-17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마녀재판(빗자루를 타고 다닌다는 마녀,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직전 교황은 마녀들의 고문을 허용함)으로 50만 명이 희생되었다.
연구에 결과에 의하며 1562-1684년 남서독일에서 일어난 1,258건 마녀처형에서 82%로가 여자였고, 무기력한 노파나 하층계급 이였으며, 귀족의 기소는 단 세 번이고, 그중 한사람도 처형되지 않았으며, 의사, 변호사, 대학교수, 수사관, 성직자들은 안전했다.
이 놀라운 사실에 속죄양은 누구였는가? 생각해봐야 한다. 마법광란은 사회 특권층의 마법적 총탄이 필요했을 뿐이다. 종교의 뜻은 가장 낮은 곳에서 가난하고 약한 자의 것 이였으나, 종교의 권력은 권력자들의 욕망을 채워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21세기 종교의 개념은 놀라울 정도로 바뀌었다. 악령은 호기심의 대상이 되어 영화화되고, 생각과 행동에는 뇌의 기능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과학적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삶에 물질로만 충족하기에는 인간의 욕망이 커 정신적 행복의 의지가 필요하며 많은 사람들은 그 안식처로 종교에서 위안을 얻는다.
삶에 철학이 필요하듯이 자신이 믿고 따르는 종교철학을 심도 있게 자신을 위하여 공부를 해아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 당신은 하나님을 믿으세요? 하는 답변에 스스로의 답이 타당한가 한번쯤은 자신을 향한 질문을 던져보고, 자신의 질문에 자신이 답 할 줄 알아야 한다.
맹목적 신앙을 기독교에서는 단순이 이단이라고 치부한다. 그러나 이단이란 말은 내 종교가 아닌 타인의 모든 종교가 해당된다. 나의 종교의 믿음이 소중하듯이 타인의 종교관 또한 존중을 받아야 된다.
이단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종교철학이 교회를 위한, 목사의 잘못된 가치관 또는 교회라는 공동체에 소속되기 위해 신앙을 지탱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종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기 위해서 믿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다는 것은 확고한 신념이 없이는 믿을 수 없다. 그래서 맹신적 믿음은 위험하며 그 위험의 뿌리 속에 인간의 간악한 마음에 의해서 조롱당할 수 있다. 이런 믿음을 경계해야 할 사람은 그 믿음의 소유자들이다.
종교는 이미 ‘더 많은 재산을 헌납한자가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라로 변질 되었으며(모든 종교가 이에 해당된다고 생각 함.) 종교 속 세상으로 변질되었고 세속화된 종교는 소속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인간의 심리를 이용하여 종교적 울타리 속에 가두고 있다. 더 높이 더 웅장하게 올라가고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교인의 권리를 박탈하겠다는 이 웃지 못 할 이야기가 교회로부터 시작된 일이므로 신도들이 깨어 있지 않으면 언제든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사람은 무리지어 살아가는 동물이다. 맹수, 자연재해, 의식주를 해결하려면 공동체적 삶의 형태를 가져야 했고, 21세기 도시가 발달한 지금까지 우리는 ‘나 혼자’ 살지도 존재할 수도 없는 나약한 인간이다. 야생동물의 위험이 완전히 차단되었지만 그 자리를 인간의 만든 편리한 물질이 이기적인 인간과 결합하여 인간의 목숨을 위협한다. 우리 자신이 만든 물질이 가장 위험한 대상이 된 시대에 살고 있다.
풍요로운 먹이와 최첨단의 물질이 넘쳐 남에도 인간의 불안한 심리는 우리라는 존재 안에서 안정감을 더 많이 느끼며, 자연재해와 미래에 대한 생존본능은 두려움을 낳고 그 습성 때문에 무리지어 살아가길 원하고, 어딘가 소속된 형태를 좋아한다.
대가족 시대가 지고 핵가족이 등장하면서 먼 거리의 형제보다는 가까운 거리의 이웃이 등장하지만 이 또한 바쁜 일상과 무관심으로 밀려 나고 종교가 그 기능을 담당하고 공동의 관심사로 옆으로 앉게 된다.
종교가 가지고 있는 삶의 형태 중 하나가 공동체적 삶이다. 마을이라는 공동체가 도시발달로 허물어지면서 기독교가 공동체적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 신앙공동체는 개방된 시골의 마을형성과 다르게 출발한다. 같은 믿음의 종교가 중심이 되기 때문에 선한 신자는 자신의 부당함을 함부로 말하지 못 할 것이며,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 생각하며,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거나, 그 그룹의 리더들을 믿고 따르기 시작한다.
삶에 있어서 자신의 주체성을 타인에게 의지하기 시작하는 처음엔 편안하고 걱정하지 안 해도 될 삶이 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의 삶은 자신이 삶이 아닌 타인의 삶속에서 움직이게 되며, 결국 그들은 자신의 삶이 타인의 착취 속에 살고 있는 것을 깨달지 못하는 것이다.
협동과 공동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공동체에 속하는 개개인의 목소리와 의견을 바탕으로 삶의 질을 개선하고,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같은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밑바탕이 종교적 삶으로 시작된 신앙공동체라면 더더욱 삶과 종교(종교가 만든 회사)는 분리 되어야 하며, 종교적 사상이 삶의 목적이 되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자유의지로 택한 종교에 자신의 삶을 침해당하는 일이 없도록 스스로 점검하여 올바른 종교관을 가지고 삶의 주체로서 살아가야 더 건강한 종교생활과 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월호 사건의 총체적 부실 뒤에 종교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면서 종교(욕망)권력 남용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하여 삶을 살았던 다수의 신자들의 실망은 세월호 만큼이나 그들에게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진리를 믿고 의지하는 종교인들은 자신의 종교관에 질문을 해 보아야 할 것이다.
종교인은 자신이 믿는 신의 뜻에 합당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종교가 없는 사람은 나와 우리가 공존보다는 자신의 물질을 쫒아서 나을 버리지 않았는지.... 철학적 사고가 필요하다.
죽는 이유를 모른 채 죽어간 세월호의 많은 희생자 앞에
비난 받을 대상이 우리가 아닌지 스스로 반성을 해 보자.
이글은 기독교를 폄하하기 위해서 쓴 글은 아니며, 모든 종교인들이 올바른 종교관을 가지고 종교생활을 할 때 자진의 믿음을 지킬 수 있으며, 맹목적인 신앙이 얼마나 위험한지 스스로 일깨워 삶의 주체로 살아가길 원하며, 평소에 가지고 있던지 지극히 개인적인 종교에 대한 생각을 적어 본 것이다.
‘돈의 신’은 자유를 주면서 박탈하고 평등의 환상을 주면서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며, 행복을 맛보게 하면서 그것을 지독한 불행의 맛, ‘똥맛’이 되게 한다.
인간은 돈의 신이 유일하게 지배하는 세계에서 행복해지지 않는다. (-책; 시장전체주의 문명과 야만- 도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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