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피로사회를 읽고

세인트 헬레나 2013. 10. 1. 22:20

 

피로사회

한병철(: 문학과 지성사)

세인트헬레나

 

당신은 할 수 있습니까? , 할 수 있습니다. 이 긍정의 힘인 자유로운 자기 에너지가 피로를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자본주의 사회가 강화될수록 할 수 있다목표는 누구나에게 필요한 구호가 되었다. 그 누구도 단 한 번도 의심 없이 할 수 있다을 통해서 오는 긍정의 질병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21세기 우리사회는 우울증과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등으로 피로가 나타나고 있다. 부정이 아니라 긍정의 과잉으로 일어나는 병이라고 한다. 무엇 때문에 우리사회를 피로증후군으로 점령하고 있는지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의 철학 강의로 들어가 보자.

 

 

지난 세기는 경계성이 뚜렷한 안과 밖, 친구와 적, 나와 남처럼 낮선 것은 무조건 막고 이질적이면 제거의 대상이었다. 오늘날은 차이로 대체 되었다. 차이란 같은 것이나 마찬가지고 격렬하게 반응하는 면역체가 없다는 것이다.

면역반응을 촉발시키기 위해서 타자의 파편을 자아 속으로 투입된다. 저항체계는 타자와 직접 싸우지 않기 때문에 치명적일 수 있는 큰 폭력을 방지하기 위해서 약간의 폭력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부정성이 많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음을 의미하고 21세기 신경질환들이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된 병리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세계의 긍정화는 새로운 폭력을 낳고 그 폭력은 시스템 자체 내에 내재한 것이며 내재된 성격으로 인해 면역저항을 유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긍정성의 폭력은 박탈하기보다는 포화시키며,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 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직접 지각되지 않는다.

신경성 폭력은 이질적인 부정성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내부 시스템에 내제 되어 있어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소진증후군도 긍정성 과잉의 징후이며 자아가 동질적인 것의 과열로 타버리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면역학적으로 설명한 이 주장이 어렵긴 해도 현대병이 되어버린 신경증을 철학적 사유로 풀어 놓은 것이 놀랍고 흥미롭다.

 

해서는 안 된다. 해야만 한다. 이 철학적 사유는 언제나 논쟁의 대상이 된다. 해야 하기 때문에 한다가 아니라 할 수 있기 때문에 해야 한다는 소유가 아닌 능동적 존재의 가치(소유냐 존재냐- 에리히 프롬-)를 이야기 해왔는데, ‘할 수 있음의 긍정적 사회가 성과사회에서는 우울증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 낸다고 한다. 무엇 때문인지 다시 강의 속으로 들어가 보자.

 

사회적 무의식 속에는 생산을 최대화하고자 하는 열망이 숨어져 있고 생산성 향상을 위하여 성과의 패러다임내지 할 수 있음으로 대체 된다. 긍정성은 부정성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며, 당연이 해야 하는 일을 능력으로 방향 전환하게 한다.

알랭 에랭베르의 시각: “우울증이라는 병은 권위적 강제와 금지를 통해 인간에게 사회계급과 성별에 따른 역할을 부여 규율적(규칙) 으로 다른 사람에게 자기 주도적으로 될 것, 자기 자신이 될 것을 요구는 새로운 규범으로 대체되는 순간 나타나기 시작한다. 우울한자는 컨디션이 정상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하려고 애쓰다 지쳐버리고 만다.” 오직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명령이 우울증을 낳는다는 것이다.

저자 한병철은 알랭 에랭베르의 논의 중 성과사회의 시스템의 폭력을 간과하고 있으며, 심리적 경색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지적 했으며 오직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명령이 아니라 성과를 향한 압박이 탈진 우울증을 초래한다고 하면서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은 과도한 책임과 주도권이 아니라 후기근대적 노동사회의 새로운 계율이 된 성과주의의 명령이라고 한다.

또 알랭 에랭베르는 니체의 주권적 인간(자율적이고 창조적인 인간)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한다. 주권적 인간에게는 그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명령하는 상위 존재는 없다고 한다. 긍정성의 과잉 상태에 아무 대책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하며,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 자기 자신을 착취 하며, 자신이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 발발하며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 하며,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적 질병으로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이라고 한다.

 

 

피로사회에 필요한 삶.

깊은 심심함: 멀태스킹(다중성, 여러 일을 동시에 하는 것) 시간 및 주의 기법은 진보를 의미하지 않는다.

정보사회를 사는 인간만이 갖추고 있는 능력은 아니며 오히려 퇴화되고 있다.

동물은 먹는 동시에 경쟁자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하고 잡아먹히는 일없도록 경계해야하며 동시에 새끼들도 감시하고 짝짓기 상대도 시야에서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까닭에 동물은 주의를 다양한 활동에 분배하지 않을 수 없고 그 까닭에 사색에 깊이 잠기지 못한다.

사회적 발전은 인간을 동물과 같은 수렵자유구역으로 만들고 있다.(컴퓨터 게임) 그래서 좋은 삶에 대한 관심은 생존자체에 대한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다.

철학을 포함한 인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다양한 과업과 정보처리 과정 사이에서 빠르게 이동하는 초점은 심심한 것에 대해 참을성이 없다.

창조적 과정에 중요한 깊은 심심함(사색)허용하지 못한다. 발터 벤야민은 깊은 심심함은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라고 말했다. 지나치게 활동적인 자아는 깊은 사색할 능력이 주어지지 않는다.

 

 

사색적인 삶: 아름다운 것과 완전한 것이 변하지 않고 무상하지 않으며 인간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존재 경험과 결부 되어있다. 떠나는 것, 잘 눈에 띄지 않는 것, 금세 사라버리는 것이 사색주의 앞에서만 자신의 비밀을 드러낸다. 길고 느리게 접근하여 오랫동안 머물 줄 아는 사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한다. (폴 세잔은 사물의 향기도 볼 수 있노라고 말했다.)

우리 문명이 평온의 결핍으로 새로운 야만 상태로 치닫고 있으며 활동성이 강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는 시대는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활동적인 삶: 한나 아렌트 주장: 행동의 가능성을 탄생을 지향하며 행동의 영웅성을 강조한다. 기적은 인간의 탄생이며 탄생의 힘을 바탕으로 행동을 실현 할 수 있는 시작에 있으며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의 자리에 행동이 대신 들어섰다. 인간에게 행동의 의무를 부과시키고 행동이 종교적인 차원으로 승화된다.

아렌트는 인간을 노동하는 동물로 격하시키고 노동사회로 행동의 모든 가능성을 파괴해버린다. 능동적인 행동이 새로운 과정을 발동시키는 것과 달리 근대 인간은 익명적 삶의 과정에서 수동적으로 끌려가고 있다 것이다. 이제 사유도 계산이라는 뇌 기능의 전략이며, 제작과 행동을 아우르는 삶은 노동 수준으로 떨어진다. 아렌트의 관점은 이시대의 인간의 능력이 영웅적으로 활성화 되면서 출발했지만 수동성으로 귀결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저자 한병철은 오늘날 성과사회에서는 이런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한다.

후기근대 노동하는 동물은 자신이나 자아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며 노동사회는 개별화를 통해 성과사회, 활동사회로 변모했으며 팽팽하게 자아로 무장되어 있다.

인간이 자신의 개성을 포기하면 동물적 특유의 느긋함이 있어야 하는데 노동하는 동물은 전혀 동물적이지 않으며 과도하게 활동적이고 신경과민 상태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근대는 신과 피안에 대한 믿음뿐 아니라 현실에 대한 믿음도 상실하여 인간의 삶을 극단적인 허무 속에 빠뜨린다. 후기근대의 자아는 완전히 개별적으로 고립 되어 있고 죽음의 기술로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덜 주고 지속적인 감정을 불러일으켜야 할 종교도 그 시효가 다 되었다.

서사성을 지닌 죽음의 기술이 존재하지 않는 까닭은 벌거벗은 생명체라도 건강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겨났으며 니체는 신의 죽음 이후에 건강의 여신이 자리에 등극한다는 말처럼 건강의 가치가 절대화 되었다.

 

 

보는 법의 교육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교육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세 가지 과업을 거론한다.

인간은 보는 것, 생각하는 것, 말하고 쓰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러한 배움의 목표는 고상한문화이다. 보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눈의 평온과 인내, 자기에게 다가오게 하는 것익숙해지도록 한다는 것의미한다.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은정신성을 갖추기 위한 최초의 예비교육이다. (인간은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천박성은 자극에 저항하지 못하고 자극에 대해 아니라고 대꾸하지 못한 것에 원인이 있으며 즉각 반응한 것 또한 모든 충동에 그대로 따르는 것으로 일종의 병이며 몰락이며 탈진이다.)

니체가 여기서 표명하는 것은 사색적 삶의 부활이다. 시선을 외부 자극에 내밀기보다는 주체적으로 조종하면 사색적 삶은 어떤 활동과잉보다도 더 활동적으로 된다.

니체가 말하는 중단하는 본능이 없다면 행동은 안절부절 못하는 과잉활동적 반응과 해소 작용으로 흩어져버릴 것이다. 가속화와 활동과잉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분노하는 법도 잊어가고 있다. 분노는 총체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오늘날 분노대신에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못한 짜증과 신경질만 확산되어 가고 있다. 짜증과 분노는 공포와 불안과 유사하지만 공포는 특정대상에 관 것 것이라면 불안은 존재 자체의 의문이다. 불안은 현존 자체의 붙들고 흔들어 되고 분노는 전체를 부정하여 분노가 보여주는 부정성의 에너지는 예외적 상태이다. 오늘날 사회 전반적인 긍정화는 모든 예외상태를 흡수해버린다. 증대되는 세계의 긍정성이야말로 예외 상태면역성과 같은 개념이다.

힘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긍정적 힘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 힘으로서 하지 않을 수 있는 힘,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이다. 부정적 힘은 단순한 무력함과 다르며, 무력함은 그 무언가에 종속되어 긍정적이 될 수 있지만 부정적 힘은 무언가를 종속되어 있는 긍정성을 넘어선다. 부정적 힘없이 무언가를 지각할 수 있는 긍정적 힘만 있다면 긍정의 힘 긍정성의 과잉으로 계속 생각해나기만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바틀비필경사 바틀비. 저자 허먼 멜빌: 백경

(바틀비는 월가의 규율사회에서 그렇게 안하고 싶습니다.”고용주의 모든 지시에 No라 대답한다. Yes만 통용되는 회사에서 그는 점점 고립되어 가고 급기야 고용주도 끌어 내려지게 하지만 그을 쫒아내기 위해 회사까지 옮기게 된다. 계속 그렇게는 안 하고 싶다고 말하던 비틀비는 굶어 죽는다.)

바틀비는 후기 근대적 너 자신이 되어라라는 성과사회의 명령에 부딪힌 적이 없어 바틀비 자기 자신이 된다는 목표를 이루지 못해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주도적 활동에 대한 요구나 가능성이 생겨날 여지가 전혀 없는 사회가 바틀비를 병들게 한 것이라고 한다.

 

 

단신곡예사 저자 카프카: 변신

광대는 40일 동안 물을 입술에 축이는 것 외에 아무것도 마시지 않는 묘기를 보인다. 사람들은 그가 몰래 먹지 않나 감시하는 즐거움과 그가 말라가는 것을 보기 위해서 모여 든다.

40일은 견디기 어려운 고행이고 단식으로 오는 우울증도 청중들의 박수로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수십 년간 이어오던 단식은 인생자체가 되어 버렸고 40일을 넘어서면 단식의 쾌감은 최고조 향하여 가속된다. 더 큰 쾌감의 유혹을 물리칠 수 없어 단식을 계속한다. 40일만의 단식을 허락한 관중은 빨리 음식유혹에 지는 광대를 보고 싶어 했기에 더 이상 관심을 끌지 못한다. 계속 단식을 이어가던 광대는 굶어 죽는다.

단식곡예사에게 자유의 감정을 주는 것은 거절의 부정성뿐이다. 하지만 그러한 자유의 감정도 숨겨진 가상적 자유라고 한다.

 

피로사회

활동사회라고 할 수 있는 성과사회는 서서히 도핑(약물)사회로 발전해 간다. 도핑은 성능 없는 성과사회를 가능하게 한다. 최근 과학자들은 이 약물 사용 하지 않는 것이 무책임 하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외과의사가 신경향상제 도움으로 정신을 집중하여 수술하면 실수도 줄여들고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다고 공공성만 보장하면 모두가 그 약을 원한다. 스포츠에서도 도핑이 허용된다면 경기는 약학적 경쟁의 장으로 변질되고 말 것이다.

약물 금지만으로 인간 전체가 성과를 산출할 것을 요구하는 사회적 발전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과사회 활동사회는 그 이면에 극단적 피로와 탈진 상태에 놓여 있으며 이러한 심리 상태는 부정성의 결핍과 과도한 긍정성이 지배하는 세계의 특징적 징후이다. 과도한 성과향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

 

 

이 철학책은 독자에게 친절하지 않는 것 같다. 철학적 소양 없이 살고 있는 우리에겐 너무 어려운 책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어야 되는 까닭은 자본주의 사회가 시작되면서 긍정에너지가 우리사회에 가져온 병리현상을 철학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피로사회에서 몸이 아프면 병원으로 달려가면 의사는 빨간약 한 알을 처방 하고 한 일주일 푹 쉬세요.” 할 것이다. 일주일 쉬고 난후에도 몸은 계속 아픈 곳 없이 아프고 무기력해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같은 상태가 계속된다. 이런 피로와 우울들이 나로부터 생성되어 나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이 피로함과 우울이 내가 아닌 현대사회가 원하는 긍정의 에너지로 생성되고 긍정의 에너지는 할 수 없다는 면역체를 가지고 있지 않아 아니오라 말하지 못하고 분노하지 못하고 만다. 그래서 는 쉽게 무기력해지고 탈진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런 피로와 우울함에 면역을 주기 위해서는 깊은 심심함과 사색적인 삶 지향하고 과잉활동(노동)을 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이 책을 읽는데 한번 실패를 하고 접어다. 활자중독성을 가지고 있는 이 심심함을 견디지 못해 다시 읽기 시작하면서 이 책의 매력에 빠져 들었고 철학적 사유는 어느새 나의 것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