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수필 쓰기

나의 소중한 시간을 찾아서

세인트 헬레나 2023. 9. 10. 20:26

  유난히 비가 많이 내리는 올해 여름. 8월 중순을 넘어서면서 아침저녁 서늘한 바람결에 여름이 가고 있음이 느껴진다. 그러나 여전히 무더운 한낮, 자연을 가두어버린 도심에 소낙비가 내린다. 자동차 바퀴에 -!’ 쓸려가던 빗물이 아스팔트를 투영시키며 시커멓게 흘러간다. 비 내리는 날이면 늘 그래 듯이 어린 시절이 그립다.

엄마 밭에 갔다 올 테니, 소낙비 오면은 옥상에 있는 고추 거둬라. 빨래도 걷고.”방에 있는 나을 향해 말하는 큰 목소리와 함께 대문을 나서는 엄마 발소리가 멀어진다. 꼬꼬댁 꼭꼭 거리는 닭울음, 들려오는 새소리, 풀벌레와 맴맴 거리 매미, 온갖 자연의 합창으로 시끄러운데, 시골집은 앞산을 바라보며 고요하기만 하다.진녹색 대나뭇잎과 감나무, 살구나무, 호두나무 아래 무성하게 자란 풀 옆 샐비어꽃이 붉게 피어나고, 봉숭아 백일홍, 채송화, 접시꽃, 칸나, 나리꽃, 코스모스 등 하얀꽃, 빨간꽃, 노란꽃, 분홍꽃들이 하늘거린다. 마당 한가운데 서서 올려다본 가을로 가는 하늘빛은 투명하고 파랗다.

새하얀 뭉게구름이 손에 닿을 듯 두둥실 떠 있는 구름 끝에, 잿빛 구름이 만들어지면서 멀리 있는 산머리를 빠르게 덮는다. 소낙비가 오려나!’ 중얼거리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람이 일기 시작한다.대나뭇잎이 더욱 짙은 초록으로 출렁거리고, 풀잎이 눕고 일어서고, 꽃들이 너울너울 춤을 추고, 새들이 호들갑스럽게 짹짹거린다. 느릿느릿 걷던 두꺼비와 긴 더듬이를 내밀고 걸어가는 달팽이, 귀뚜라미도 비를 피할 곳을 찾기 시작하고, 긴 행렬을 줄지어 작은 나뭇잎을 입에 물고 나르는 개미걸음이 빨라지더니, 흙냄새와 뿌옇게 마당의 흙이 일어나고, 나뭇잎에 방울방울 모양을 만들며 비가 떨어진다.

옥상으로 빠르게 올라가는 쿵쿵거리는 발걸음 소리와 빗소리에 모든 자연과 사물들이 소란스럽게 비를 피한다. 금세 소낙비는 나보다 먼저 빨간 고추에 내리고, 바구니에 쓸어 넣은 빠른 손놀림은 늦기만 하다. 정신없이 비닐을 덮어 젖지 않게 만들고, 올려다보니 널려진 옷들이 축축 늘어져 빨랫줄에 꼬여 비바람에 흔들린다. 이미 흙먼지를 쓸어낸 마당은 작은 모래흙을 들어내면서 빗물이 흘러간다. 축축한 빨래만큼 뜨거운 열기와 땀과 빗물로 범벅이 되어 있는 머리카락과 몸에 달라붙은 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빗물에 흠뻑 젖어 꽃 이파리 뒤에 붙어 날개를 오므린 채 헐떡거리는 나비와 같은 모습으로 쏟아지는 소낙비를 그대로 맞아본다. 빗방울의 함성이 세차게 나를 씻겨 내린다.

왜 고추는 이 한여름에 빨갛게 익어 힘들게 하나! ㅎㅎㅎ실없는 생각을 하며, 몸단장하고 나오니, 비는 어느새 그치고 더 습한 열기와 함께 여름 속에 있다. 다시 고추를 널기 위해 비닐을 들추니, 매콤한 냄새와 축축하게 젖은 후끈한 열기가 올라온다. 뜨거운 태양이 빨간 고추와 나을 향해 열열하게 내리쬔다. 질식할 것 같은 습한 뜨거움과 적막감에 사로잡힌 침묵. 내가 존재함을 알려주듯, 파란 하늘로 손을 쭉 뻗어 올리고, 내 그림자와 함께 아아---’소리를 질러본다. 골목 집 개들이 심심하고 무료하던 차에 들려오는 소리에 대답하듯 멍멍멍 짖어대더니, 구부러진 허리에 어깨너비보다 더 큰 바구니 옆에 끼고, 비에 젖어 반쯤 말라버린 옷을 입은 엄마가 고추 잘 단속했냐! 비 많이 맞았어! 다시 널었냐?” 물으면서 평상 끝에 걸터앉으신다. 올해처럼 유난히 비가 많았던 어느 여름날 고추 말리기를 반복하다 가을이 왔다.

현대인은 소낙비가 내려도 고추를 말릴 일도 빨래를 걷을 일도 없다. 자동세척하여 말린 고춧가루가 배달되어 올 것이며, 빨래건조기가 30분이면 뽀송뽀송하게 옷을 말려 주거나 아파트 베란다에서 말린다. 비를 맞을 일도 없지만, 유리창에 부딪혀 내리는 빗소리와 은빛 빗방울이 반짝이는 거미줄과 큰 꽃봉오리가 빗물을 머금고 축쳐진 목수국의 여름풍경은 여전히 아름답다. 이처럼 아름다운 날을 회상하고 추억한다는 것은 자신이 느끼며 살아온 살아있는 즐거움이고 행복한 실재이다. 자신이 보고 체험한 삶의 기억만이 온전한 나의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들렌의 단순한 맛 속에 기쁨의 이유가 논리 이상 담겨있다고 생각되지 않더라도 기쁨의 이해가 확신이 가듯, 시간의 세계를 초월하여 느끼게 하고 우리들 속에서 시간의 세계를 초월한 인간을 다시 창조한다라고 프루스트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말한다. 현재의 시간을 초월하여 만나는 시간을 찾는 것은 누구나 간직하고 있는 자신만의 행복한 기억일 것이다. 나만의 행복한 추억이 생의 한가운데에서 고통, 죽음, 질병, 고독, 절망, 불안, 늙음 등으로 힘들어질 때, 나를 현재라는 삶 속에서 탈출시킬 방법은 자신만이 소중하게 간직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일이다.

나에게 잃어버린 시간 중 하나는 소낙비 내리던 옛 여름 풍경이다.

여름 소낙비가 내리면 가까운 건지산이나 덕진공원, 전주천(가족과 친구 아니면 홀로)을 걸어보자. 비와 나와 함께한 자연의 향연은 평생의 기억으로 당신을 위로할 것이다.

                                                               참고: 마르쉘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송천마을신문 9월호 /  올린 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