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동물에서 유래된 인간를 읽고

세인트 헬레나 2013. 12. 9. 19:58

 

                                                      동물에서 유래된 인간

                                                                                                   ( 다원주의의 도덕적 함의) 제임스 레이첼스 지음 출: 나남

                                                                                                                                세인트 헬레나

 

찰스 다윈의 진화론은 19세기 혁명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다윈의 진화론을 이해하지 않으려 하며, 진화론 자체를 이상한 무신론자의 신앙쯤으로 생각하고, 진화론을 거론하는 것이 신을 불경스럽게 한다고 생각하며 신의 존재믿음을 갖지 않으면, 죄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기독교인이 아닌 많은 사람들 또한 창조자가 있을 것이며, 이 지구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세계의 모든 종교의 근본은 토테미즘이며, 기독교(서양) 문화를 받아들이기 이전 우리 선조들은 태양과 바람과 바다와 큰 나무와 바위와 자연의 위대함과 두려움을 경배하고 찬양했다.

아마 인간이 자연 앞에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를 실감할 때 가장 겸손해지고 그 누구, 무엇에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삶에 대한 불안정 생존의 본능은 위대한 그 무엇이 필요했으며, 인간은 믿음에 의지하게 되며, 나 아닌 다른 그 무엇의 힘과 보호와 안정을 원하며 그 믿음으로부터 위안을 받았을 것이다.

많은 믿음의 신들로부터 삶은 시작되었고, 신은 도덕적 를 심판하고 죄의 용서와 벌을 주는 주관하는 대상이 된다. 늘 생각과 행동으로부터 에 대한 두려움은 양심보다 앞섰고, 양심은 규율이라는 도덕으로 법이 된다. 그래서 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도덕은 허물질것이며, 양심은 중립적인 자리보다 더 높은 위치에 앉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윈의 진화론 자연선택을 공부 할수록 동물과 다름없는 인간의 삶 속에 가장 인간답게 하는 도덕, 양심이라는 인간만이 가능한 이런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개인적인 숙제였다. 사회문화적 진화라는 사회현상에 적응하는 인간 이전에 동물분류 속에 속하는 인간이 의 역할을 뺀다면 과연 인간은 인간답게 살 수 있을 것인가? 다윈의 진화론을 믿는 입장에서 늘 궁금했던 과학적 사고가 아닌 철학적 사고를 이해하기 위해 이 책을 읽었다.

 

사실 이 책은 제1장 다윈의 발견은 쉽지만 2장부터 읽어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읽고 나면

진화와 윤리, 다윈주의자가 가지는 종교에 대한 생각, 동물과 인간의 차이, 인간만이 특별한 가등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종의 기원이 발간되고 다윈의 진화론이 확산됨에 따라 진화론은 예술과 종교, 정치, 윤리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현상을 설명하기 해 활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 점차 받아들여지게 된다.

최적자 생존은 치열한 경제적 경쟁을 인정하는 교훈으로 해석되기 했으며, 스펜서는 다윈의 이론에서더 진화한혹은덜 진화한생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체로 서로 다른 환경적 압력에 대응하여 서로 다른 종이 서로 다른 경로를 따라 현재에 이르렀을 따름이다. 원칙적으로 자연선택은 영원히 진행하는 과정으로 어떤 특정한 방향으로 나가는 과정이 아니다. 환경 조건의 변화에 따라 일부 종을 제거하고 다른 종을 변화시키면서 이런 저런 방향으로 나간다.”다윈의 말을 받아들지 못하고 생물들은 자신들의 삶을 연장하고 안락함을 증진시키는 도움이 되는 행위 유형으로 진화시켰다고 해석하기도 했다. 이를 강조하여 그는 도덕의 핵심적인 특징을 설명할 수 있었다. 삶의 연장과 질의 향상, 공동체 안에서 서로 도와주는 행위, 좋은 행위의 목표달성은 윤리이론에 정리하기도 한다.

다윈은 발달단계를 언급할 때 좀 더 높은좀 더 낮은같은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려 했다. 그의 이론은 진화론적 변화가 어떤 목적 혹은 방향과 결부 있음을 부정하는 데에 있었다. 그의 이론에는 전진도 없고 퇴보도 없다. 오직 변화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적응적인 행위가 바퀴벌레에 비해 더 낫다거나 더 높다고 간주한 권한이 없다. 바퀴벌레들은 그들 자신의 환경에 우리 못지않게 잘 적응된 존재들이다.

 

다윈주의를 반대한 마지막 철학자 베르그송은 다윈의 자연선택이 우연변이에 작용한다고 주장. 이러한 변이는 생물의 어떠한 부분에도 가리지 않고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베르그송은 자연선택만으로 진화가 복잡성이 증가하는 생물들을 산출한다.’ 는 사실을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윈은 복잡한 생물들의 부분들에 영향을 주는 임의적인 변이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흔하다는 데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한 변이는 한 생물이 온전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상호 작용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사실상 유용한 변이들은 극히 드물 것이다. 다윈이 생각하기에 유용한 변이들의 거의 향상 조그만 이점을 주는 미세한 변화였다. 이것이 자연 선택이 관찰 가능한 결과를 나타내기 위해 수 세기가 걸리는 느린 과정의 한 가지 이유이다.

 

1930-40년대에 새로운 진화론적 종합은 생물학에서 정설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자연선택이 특정한 행동 형태와 결부되어 있는 유전자를 선호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서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어떤 주어진 방식으로 행동하려는 경향이 주는 이점은 무엇인가를 사회생물학을 통해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게 되었고, 자유로운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인간의 행동 양태가 유전적으로 통제된 힘의 산물임을 파악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1950년대 널리 확산 되게 된다.

모리스 :벌거벗은 원숭이< 털 없는 원숭이>, 타이거 <집단 내의 인간>, 아드리의 <영토유지 본능>, 로렌츠의 <고격성에 대하여> 윌슨 <사회생물학: 새로운 종합>등 매혹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아마 진화론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이들의 책을 한두 권 만나봤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윌슨이윤리학이 철학자들의 손에서 벗어나서 생물학화 될 시기가 도래했다.”고 주장했지만 사회생물학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는 이러한 이론적인 문제의 해결책을 1964년 해밀턴은 저명한 논문을 제시한다.

해밀턴의 착상은 많은 개인들이 서로 유전적으로 유사하다는 관찰에서 기초하고 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형제들과 유전자의 전반을 공유하고, 친척들과는 1/8의 유전자를 공유한다. 유전적으로 유사한 개인들의 생존 기회를 증진시키려는 방식의 행동은 사실상 자기 자신의 유전자를 후속세대에게 전달할 기회를 증진시키는 방법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자연선택이 가까운 친척에게 이타적으로 행동하려는 경향을 선호하리라 생각해 볼 수 있다.

혈연 선택 이론은 우리가 도덕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윌슨에 따르면 혈연 선택 이론은 타인을 배려하는 현상은 철학적, 종교적 이론을 효과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 이론이다.

인간은 이웃 사랑의 올바름을 직관하기 때문이면 고상한 이론에 반응을 나타내기 때문이 아니라 그 행위가 자연선택이 선호하는 경향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도덕적인 (이타적인) 존재이다.

 

많은 사람들은 진화론하면 계속 선호하는 방향으로 진화할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그렇게들 이해하고 있다. 진화론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 요약해 봤다.

진화론자들은 인간의 도덕성 인간의 존엄성을 인간만이 가졌으며 특별하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헉슬리의 주장은 우리가 유인원의 친척이긴 하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유인원의 친척이라는 사실을 우리 자신을 소상하게 생각하는데 에, 유인원에 대해 경멸적인 관점을 갖는데 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으며, 우리는 여전히 인간이며, 고상하면서 존중의 대상의 일 수 있다.

그레이 또한 완전하게 된 영혼만이 최종적인 삶을 위한 투쟁에 존속되며 이때에야 진정으로 산다. 고 생각할 수 있다. 영혼 안에서 모든 가치가 포함되고 그것만이 불멸의 가치를 영생의 약속을 가지며 영생의 잠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하등동물의 친척이라는 생각에 거부할 마음 갖는 이유는 무엇인가?

동물의 처우 방식을 다루는 도덕동물들의 친척임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동물들이 우리와 유사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때 우리는 동물들이 우리가 갖는 권리와 동일한 권리를 갖는다는 사실을 거부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부여하는 도덕적 지위를 단순한 동물들에게 부여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인간이 존엄하다는 관념은 서구 도덕의 핵심이 이루는 기본적인 관념에서의 관심이 있다.

문학 종교 철학에 공통적으로 서구의 도덕의식에 반영되어 있다. 인간의 삶이 성스럽거나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다는 생각. 인간 아닌 존재의 삶이 인간의 것과 동일한 정도의 도덕적인 보호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지적이 제기 된다. 이러한 관념은 종교와 역사와 서로 얽혀있다.

종교는 세상의 본질 그리고 원인과 목적을 방대하게 설명하며 인간에게 특권적 지위를 부여 한다. 종교자체가 인간 자신의 가치를 확고히 하려는 인간의 욕구를 표현한다고 설명되기도 한다.

서구 도덕적 전통에서 무고한 인간의 생명은 침해할 수 없는 대상으로 파악되었다.

기독교가 전파되기 이전 자살은 오직 자신만의 생명을 앗아가기 때문에 타살에 대한 금지에 비해 그리 엄격하지 않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인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자살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고 주장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이성이 영혼의 정수라는 입장을 견지 했으며, 인간의 생명이 신성하다고 여기는 후대 사상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는 목숨을 스스로 포기하기에는 자신의 가치가 너무 크다는 점을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살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자애의 정신과 상충된다고 말했다.

칸트 또한 어떤 사람이 자살을 한다면 그는 사실상 자신의 가치가 야수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자살을 한 사람은 자신의 직위를 버리고 다른 세상으로 간 것이다. 그는 신을 거스른 자로 파악될 것이다. 칸트의 마음속에도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관념이 신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진 인간이라는 관념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다윈주의가 인간이 존엄하다는 관념을 훼손했는가?

우리의 믿음들이 엄격한 논리적 함의라는 방법 외의 연결을 통해 결합되어 있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믿음은 다른 믿음을 함의하지 않으면서 그에 대한 증거가 되거나 그 것을 지지할 수 있다. 증거가 축척됨에 따라 믿음에 대한 우리의 확신은 강화될 수 있고, 반대로 증거가 문제시됨에 따라 우리의 확신의 강도가 약해질 수 있다.

새로운 정보로 인해 어떤 믿음을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하게 될 경우 그러한 믿음은 새로운 정보로 인해 훼손된다. 새로운 증거가 나타남에 따라 자신의 믿음을 수정하는 상황이다.

어떤 믿음이 훼손되는 경우와 단순히 믿음에 대한 신뢰가 약화되는 경우는 구분이 필요하다.

믿음이 훼손되는 경우와 믿음이 잘못되었음이 입증되는 경우의 차이를 분명히 해야 한다.

 

17세기의 전성설: 각 개체가 모든 부분이 이미 형성된 상태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말피기는 자신의 원시적인 현미경을 통해 계란 속에 이미 존재하는 닭의 원기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전성설은 인간의 생식에 적용되어 함입설이 되었다.

(모든 미래 세대는 이브의 난소 안에 이미 존재---)

전성설의 난자론 (하비는 알이 모든 동물의 공통적 기원이다라고 주장했다.)

1677년 레벤후크는 최초의 정자를 목격하고 여성의 난자만이 인간 태아의 유일한 원천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난자론이 힘을 잃자 반대로 정자론이 전성설을 지지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해석 되었다.

(난자가 수컷의 정자에 완전히 포함되어 있으며, 생물의 발생에 필요한 영향 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입장)

오늘날 우리는 태아가 수정란들로부터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는 단세포들이며, 인간의 유전 물질을 함유하고 있음을 제외하고는 완전한 모습의 인간과 전혀 닮지 않았다

교회의 입장은 이러한 새로운 지식으로 인해지지 근거를 박탈당함으로 상처를 입게 되었다.

전통 도덕에 스며들어 있는 생각은 인간이 신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에 유일한 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특별하다는 것이다.

 

다윈주의자는 종교에 회의적인가?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종교에 아무런 적대감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화와 종교가 실제로 양립 가능한가를 알고 싶어 한다.

종교가 세상에 대한 어떤 종류의 경건한 태도 이상이 아닌 것으로 파악될 수 있다. 기독교 근본주의 창세기의 창조에 대한 이야기는 문자 그대로의 진리이다. 다윈주의 진화론은 분명 이러한 입장과는 양립하지 못한다.

다윈주의 진화론은 신의 형상 테제’ (테제: 정립, 방향, 형태, 주장 헤겔철학 기원) 인간이 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으며, 그러한 창조에서 특별한 지위를 누릴 수 있다는 생각에 유신론과 양립 할 수 없다.

더욱 커다란 문제는 유신론 자체다. 종교가 구체적인 성서 구절에 무비판적으로 의존하는 태도와 거리를 유지 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러한 태도가 믿지 않는 사람들은 지옥에 간다.’와 같은 비난받아 마땅한 입장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목적 없는 자연

기능적인 시스템으로서의 생물이라는 개념의 생물학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우리가 심장을 단지 피가 통과하는 커다란 근육이라고 말한다면 중요한 정보를 모르는 일이다. 우리는 심장의 다른 부분과의 관계를 언급해야 한다. 피는 산소와 영양분을 실어 나른다. 하지만 심장이 없는 경우 피는 순환하지 못할 것이다. 바로 여기서 심장의 목적이 언급된다면 사실 심장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목적은 만드는 사람의 의도에 의해 결정된다.

신이 생물학적 구조를 창조할 때 그 기능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그들이 목적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은 다윈 이전의 생물학자들의 주장이며. 그러한 가설은 아름답고 복잡한 생태계의 적응 방식을 설명하는데 필요했을 뿐이다.

복잡한 적응 방식을 의식적인 설계를 상정하지 않고 설명할 수 있음은 필요한 것이라고는 임의적인 변이와 자연선택뿐이다.

생물학적인 구조가 지금처럼 존재하는 이유는 부분들이 전체에 부합되기 위해 설계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변이들이 삶을 위한 투쟁에서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전체로서의 생물은 단지 진화에 의해 주어진 이러한 변이들의 합계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얼마나 다른가?

우리가 동물과 다르지 않다면 우리는 동물과의 도덕적인 관계를 정당화해야 할 부담을 안게 된다. 17세기 생리학의 발전은 동물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며 이루어졌다.

)개의 발에 못을 박아 판에 고정시켰으며, 몸을 절개하여 내부기관들의 작동을 관할하고 울부짖는 소리로 방해받지 않기 위해 성대를 잘라내기도 했다.

동물과 인간의 유일한 차이는 인간은 자신들이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말로 알려 줄 수 있다는 정도다. 1978년 인도 정부는 붉은털원숭이 수출을 중단 했다. 핵무기 연구를 위해 동물을 사용할 수 없다는 조항을 미국이 위반했기 때문이다.

원숭이들을 치사량 이상의 방사능에 노출시키고 쓰러질 때까지 전기 충격을 주면서 강제로 쳇바퀴를 돌리게 했다. 원숭이들은 예측 가능한 방사능 과다노출 효과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

우리가 노예로 만든 동물, 우리는 그들을 우리와 동등하게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동물도 일정 정도의 합리적인 능력을 소유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수많은 사실들이 있다.

스키너의 심리학은 인간과 동물의 행동이 모두 조건화의 산물이라는 입장을 견지 한다.

인간의 행동 또한 인간두뇌-의 통제 하에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인간의 행동 목록이 아무리 광범위해도 한계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만이 도덕적인가?

인간과 하등동물 간의 모든 차이 중에서 도덕 감정이 단연 가장 중요하다.

인간 아닌 동물은 도덕적 능력이 그다지 발달된 편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에게서 도덕의 토대가 되는 능력과 동일한 능력을 갖추었다.

사회적 본능즉 타인에게 이익이 되는 행동을 하려는 우리의 자연스런 성향으로 인해 탄생할 수 있다. , , 고양이, 양 등이 동료들에게서 떨어져 있을 때 불쌍해 보이는 점, 재회 했을 때 애정을 나타내지 보았을 것이다. 말들은 가려운 곳을 서로 깨물어 주고, 소들은 핥아 준다. 원숭이는 몸에 있는 기생충을 잡아 준다.

붉은원숭이 O가 음식을 얻기 위해 사슬 중 하나를 잡아당길 때마다 SA가 있는 바닥은 전기 충격을 전원이 연결된 망으로 짜여 있었다.

붉은원숭이에게 전기 충격을 주는 대가로 먹이를 확보하기 보다는 계속 굶주리려 했다는 실험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많은 사람들은 단순한 동물이 이타성과 같은 도덕적 특징을 갖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사회학적 본능의 진화가 지능적인 동물은 다른 대상들을 도울 경우 그 보상으로 도움을 받는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학습할 것이고 돕는 행동이 일단 시작하면 습관이 될 것이며, 사회적 칭찬과 비난을 통해 강화될 것이다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부모와 자식, 형제가 서로 나타내는 이타적 행동에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자연선택이 작동하는 것을 다윈보다 더 많이 알 수 있는 현재 유전자에 대해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유전자는 개인의 형질 중 전부가 아닌 일부만을 결정하는 생물학적 단위다.

아이들이 부모를 닮은 경향이 있는 이유는 생식 과정에서 부모들이 자신의 유전자를 아이들에게 물려주기 때문이다. 아이는 아버지의 유전자 절반과 어머니 유전자 절반을 물려받는다.

자식에게 애정을 나타내는 어미와 무관심한 어미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누구의 유전자가 미래 세대에 존속될 가능성이 높을까? 분명 자식에게 애정을 나타내는 어미의 유전자가 미래에 존속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형제들에게 애정을 나타내는 동물의 형제와 자매들은 도움을 주는 존재가 있기 때문에 생존하여 번식에 성공할 가능성이 커진다.

혈연선택으로 인해 유전자를 공유하는 정도만큼 특정한 친척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자식들과 형제들의 복리에 특별히 관심을 갖고 다음 사람 그리고 모르는 사람들에게 별다른 관심을 나타내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개미들은 암컷들이 자신들의 형제와 1/4의 비율로, 자매와는 3/4 비율로 관련성을 갖도록 번식한다. 암컷 개미들은 형제들보다 자매들과 세배 많은 유전자를 공유한다. 일개미들이 형제보다 자매에게 거의 정확히 세 배의 먹을거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지만 모든 이타성이 혈연 이타성은 아니다. 사회생물학자들은 호혜적 이타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다른 개체를 돕는 이유는 자신에게 유사한 서비스가 제공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경험을 통해 자신이 동료를 도울 경우 자신 또한 보답으로 도움을 받으리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도 가장 강력한 종류의 이타성은 다연 혈연 이타성이다.

 

인간의 이성과 도덕

인간의 도덕은 단순히 사회적 본능의 산물이 아니라 사회적 본능에 지능이 더해짐으로써 얻게 된 산물이다. 우리는 다양한 행동 충동간의 힘의 세기를 구분 할 수 있다. 어쩌면 사회적 본능은 다른 본능들에 비해 힘이 셀지 모른다. 우리가 두려움 혹은 배고픔에 굴복한 것에 대해 후회를 한다면 그것은 사회적 충동의 힘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본능은 영구적이며 지속적이다. 특정한 욕구들은 찰나적이다. 사회적 본능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남아 있지만 특정한 욕구는 행동할 당시에는 사회적 본능을 압도하지만 첨차 사라져 버린다. 이로 인해 우리는 스스로가 한 행동을 후회하게 되며 이와 같은 사후적 고찰을 양심이라고 부른다.

 

5장은 인간이 존엄하다는 관념을 포기하면 어떤 종류의 도덕적 관점을 대안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인가?를 서술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생물의 개별적인 특징이 그 생물이 속해있는 집단이 아니다. 도덕적 개체주의는 모든 존재들의 복리에 동등하게 관심을 가지며 처우에서의 차이는 정당화하는 적절한 차이가 있을 경우에만 그들 간의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핵심으로 삼고 있다.

 

이 책은

무엇보다 단순 생물학적 진화론 공부에서 한발 더 나가 진화론을 통해 도덕과 윤리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제1장 다윈의 발견은 정리하지 않았다. 진화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윈의 생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