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백치 (상,하)를 읽고

세인트 헬레나 2014. 11. 19. 19:36

백치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키 출 : 열린 책들

                   

                                                                                              세인트헬레나

 


 

도스또예프스키의 백치를 읽었다.

백치 미시킨 공작은 양심과 도덕 넘어 숭고한 자기희생을 통해 이상을 꿈꾸는 자의 정신 가지고 있다.미시킨 공작의 순수한 인간애적 사랑과 이해를 통해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이기와 물질적 탐욕에서 자기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는 책을 읽는 내내 인간의 고민이며. 삶의 실존의 문제라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든다. 사랑, 행복, 불행 이 형체도 없는 것들을 위해서 양심, 도덕의 심장 뛰게 할 것인가? 돈이 주는 물질적 충족감, 안락함 위해서 차가운 머리를 가질 것인가?

도스또예프스키의 소설 삶 속으로 들어가 보자.

 

빼째르부르그로 향하여 달리는 기차 타고 먼 친척 되는 예빤친 장군부인을 만나려 간다.

 

외국에서 오래 살았다는 미시킨 공작은 프랑스 리옹에서 교수형을 처하는 장면을 봤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 장면은 특히 도스또예프스끼 자신이 공상적 사회주의 모임에 연루되어 1849년 총살형을 선고 받고, 사형 집행 직전에 사면 당한 자신의 경험에 의한 회고라고 할 수 있다.

목을 잘라요. 울부짖나요?

어떻게 그래요? 일순간에 벌어지는데, 사형수를 올려놓자마자 작두날이 기계 장치에 의해 떨어져요, 단두대는 기요틴이라고 부르고 육중하고 힘이 세답니다.……. 눈 깜빡하기 전에 모가지가 떨어져 나가요. 그때까지의 과정이 괴로울 겁니다. 사형 선고문 공표, 사형 도구 준비, 사형수가 표박되어 단두대에 올라가는 시간.

사형이 행해지는 순간 사형수의 영혼의 상태는 어떠했을까? 그 영혼이 얼마나 경련을 일으켰겠는가? 영혼에 대한 모독…….

 

고문을 받게 되면 고통을 느끼고 상처를 받게 된다. 육체적인 고통은 영적인 괴로움을 앗아가고 죽을 때까지 상처를 통한 아픔을 느낄 뿐이다. 그런데 가장 심한 고통은 육체적인 상처에 있지 않을 것이다.

한 시간 후에 그 다음 10분 후에, 30초 후에 그리고 지금 당장 영혼이 육체에서 날아가 버리고 자기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사실. 중요한 것은 이런 것들이 분명하다는 가장 끔찍한 확실성입니다.

 

살인을 했다고 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그 범죄에 비해 너무도 가혹한 형벌이오. 선고문을 낭독하고 사형을 집행하는 것은 살인강도 자체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가혹한 짓이오. 밤중에 숲속에서 강도의 칼에 맞아 살해당할 위기에 처해 있는 자는 마지막 순간까지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어요,

열 배나 편히 죽을 수 있는 이 마지막 희망을 분명히빼앗아 가버린다는 애기입니다. 피할 수 있는 희망이 분명히 없을 거라는 사실 속에 처참한 고통이 있는 겁니다. 이 보다 더 심한 고통은 이 세상에 없어요.

 

나의 생각 : 인간의 정신과 육체의 간극이 아주 좁아지는 시간, 육체적 삶과 정신적 삶이 한 점으로 되어가는 시간, 희망이라는 내일의 삶을 놔버릴 때 꼭 사형이 처형되지 않더라도 이미 죽음에 이르렀음을 말해 준다.

인간이라는 사회제도 하에 영혼 존엄성의 주인은 인간만이 지킬 수 있다. 그러나 그것(죽음)을 허락하는 자는 인간이 될 수없다는…….신? 인간의 일에 무관심 할 뿐이다.

 

이글을 쓰고 있는 동안 백치 이어 죽음의 수용소에서(빅터 프랭클) 라는 책을 읽고 있다. 빅터 프랭클이 3년간 아우슈비츠라는 수용소에서 경험한 자서전적 체험 수기이다.

날마다 죽음이라는 시간 속에서 빅터 또한 선택이라는 우연의 신에 의해서 생존하는가? 죽는가? 가 달라진다. 빵 한조각과 육체적 탈진은 생존자체에 목적이 있을 뿐이다. 그 시간 속에 그들이 기다리고 날마다 생각하는 것은 살아갈 될 의미의 의지이고 존재의 희망이다.

빅터 프랭클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묘한 특성이다. 영원한 미래를 그리며 살아간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때로 자기의 마음을 미래하는 과제에 매달릴 수 있도록 억지를 쓰기도 하지만 실존의 가장 어려운 순간에 놓이게 되었을 때 미래는 자신을 구원하는 수단이 된다.” 도스또예프스끼 또한 극한 시간 속에 실존의 의미를 빼앗아 가는 시간이 인간에겐 가장 큰 공포이며 두려움이며, 미래로의 삶이 없다는 확실성 때문에 죽음보다 더 잔인하다고 미시킨 공작은 말하고 있다.

 

행복해 지는 법을 아세요? 아글리야가 외쳤다.

 

나는 12년 간 감옥에 갇혀 있었던 사람의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가끔 간질 발작을 했고, 불안을 못 이겨 울부짖으며 자살까지 시도한 적이 있습니다. 감옥생활의 친구란 천장의 거미와 철장 밖에 자라는 나무 한 그루가 전부였습니다.

그 사람은 다른 죄수들과 함께 사형대 위로 끌려가 정치범으로 총살형을 받는다는 선고문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20분쯤 후에 사면령이 내려져 그보다 감형된 형량을 선고 받게 되었지요. 그러나 그 사람은 두 개의 선고 사이에 즉 2015분 동안 나는 몇 분 후면 죽을 것이다라는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에 사로 잡혀 있었다.

세 번째 처형을 기다리고 있었고, 신부가 십자가를 들고 모든 죄수들 앞을 돌아다녔습니다.

그에게 시간은 5분정도밖에 없었던 거지요. 5분이 그에게 있어서 무한대의 시간이고 엄청난 재산처럼 여겨졌다고 그는 술회 했다. 그는 이 5분 동안 많은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라 그게 마지막 순간이라 생각 하지도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남아 있는 5분을 동료들과의 작별에 2분을 할당하고,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을 성찰해 보는 데 2분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마지막으로 주변을 둘러보데 할당했습니다. 스물일곱이란 건강하고 혈기 왕성한 나이에 죽어가야 했던 것입니다. 동료들과 작별을 고하고 그중 한사람에게 아주 엉뚱한 질문을 던지고 어떤 대답이 나올까 매우 궁금해 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해보는 2분이 찾아왔지요 나는 지금 존재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3분 후면 무언가 다른 존재로 변할 것이다. 그 존재가 생명체인지 비생명체인지 모른다. 생명체라면 도대체 어떤 존재가 될까? 그리고 어디에서 살게 될까? 교회의 황금 용마루에 태양빛이 이글거렸고 3분후면 후면 나는 저 빛과 융화될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것에 대한 혐오감과 불투명은 무섭기 짝이 없었고, 이 순간 그에게 가장 괴로운 것은 만약에 이대로 죽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나?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약 생명을 다시 찾는다면……. 그것이 영원이 아닐까! 그럼 이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다! 그때 나는 매 순간을 1세기로 연장시켜 아무것도 잃지 않고, 11초라도 정확히 계산해 두어 결코 헛되이 낭비하지 않으리라 그의 이러한 상념은 독한 마음으로 변하여 차라리 한순간이라도 빨리 총살을 시켜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겨났다고 술회했습니다.

공작은 아마도, 단 한순간일지라도 한두 푼으론 값을 매길 수 없는 법이며, 때론 5분이 그 어떤 보물보다 더욱 소중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가 봐요. 그 사람은 가명 처분을 받고 영원한 삶을 선사받지 않았나요? 그 사람은 매 순간 정확히 계산하며 살았나요?

 

너무나 많은 순간과 시간을 잃고 살았답니다.

시간을 정확하게 계산하며 산다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한 일이군요.

만약 당신이 행복했다고 말한다면 아마 이것은 조금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살았다는 것을 뜻할 겁니다.

 

나의 생각 : 어쩌면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이라는 유한성과 망각하는 시간 속에 있는 것 같다.

인간의 시간에 영원성이 있다면 인간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설령 이 순간이 덧없이 흐르는 시간이라 할지라도 내일의 시간을 위해서 생각하고 희망을 품는 이유가 내일의 시간이 오늘이라는 시간으로 올 수 없을지 모른다는 예측 불가능한 시간에 있을 것 같다. 우리가 행복한 이유는 오늘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지금 이시간의 육체와 미래의 삶을 예견하며.

 

프티죄 게임을 하면 어떨까요?

괴상한 만큼 흥미 있는 발상입니다. 우스꽝스런 발상이요. 그러다 결국 자기 자랑을 하게 될 거요. 프티죄 게임을 하면 웃음이 아니라 울음이 나올 거예요.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게임이오. 나중에는 다들 수치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던 거예요! 분위기가 유쾌하지 않아요. 천재적인 발상이요.

일생 중 가장 나쁜 자신의 행위를 얘기해 주면 되는 겁니다. 어떤 이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어떤 이는 교활하게 웃음을 지었다. 나는 내가 한 짓 중에서 가장 나쁘다고 생각되는 게 뭔지 몰라요, 거짓말을 한다면 이 게임의 발상은 의미가 없어요. 거짓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을 걸세. 이야기를 마치고 난 다음에 서로 어떤 눈으로 상대방을 쳐다보게 될지! 오로지 그것 하나만 생각해 보세요.

 

나는 세묜의 딸 마리야에게 피아노로 어떤 곡이든 한 곡만 쳐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생각이 불현 듯 들었어요. 그래서 구석방으로 갔지요. 그곳에 있는 마리야의 탁자 위에 3루블짜리 초록색 지폐가 놓여 있는 게 아니겠어요. 나는 지폐를 집어서 주머니에 넣었어요. 무얼 하려고 그랬는지는 나 자신도 모르겠어요. 내가 뭐가 씌었는지 납득이 가지 않아요.

불안한 마음으로 아무 말이나 막 지껄이기도 하고 우스운 소리를 늘어놓기도 하면서 부인들 곁에 앉아 있었어요.

30분이 지난 후 주인이 하녀를 의심하며 물어보기 시작했고, 특히 다리야라는 하녀가 의심을 많이 받더군요. 나는 비상한 호기심으로 그 일에 끼어들었어요. 다리야가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었을 때 마리야에게 선처를 바란다고 고갯짓을 하며 다리야에게 잘못을 빌라고 큰 소리로 모든 사람들이 듣게 말했어요. 모두들 나를 바라봤고, 3루블 짜리 지폐를 내주머니에 넣고 그렇게 설교를 한다는 것이 여간 기분 좋은 것이 아니었어요. 그날 저녁 나는 그 돈으로 식당에 가서 술을 마셔 버렸지요. 그때 빨리빨리 그 돈을 다 써버리고 싶은 심정이었거든요. 특별히 양심의 가책 따위는 느껴 본적이 없었어요. 하지만 그런 짓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하녀는 다음날 쫓겨나고 말았지요. 당신은 그런데도 태연하셨나요? 내가 제 발로 찾아가 범인이 나라고 이실직고 할 수는 없잖아요?

페르디쉬첸꼬는 히히거리며 웃었다. 이렇게 비열할 수가! 아니! 당신은 가장 나쁜 짓을 했던 경험담을 원하면서 그걸 멋지게 꾸미길 바라는 거예요?

 

여러분 나는 살아오면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다지 우아하지 못한 짓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35년쯤 지났을까, 하지만 그때의 강한 인상을 돌이킬 때마다 나는 일종의 양신의 가책을 느끼고 있습니다.

나는 육군 소위로 고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니끼포르 당번병이 있어서 나의 살림을 아주 꼼꼼하게 돌봐 주고 있었습니다. 그는 돈을 저축하고 바느질, 걸레질은 물론 살림에 보탬이 될 수 있다면 손에 닿는 모든 것을 도둑질까지 해 왔을 겁니다. 배정 받은 숙소는 여든 살쯤 보이는 퇴역부인의 미망인 집이였습니다. 남편과 45년 전 사별 한 상태로 마음씨 사나운 조카딸과 살다가 그녀마저 죽어버리고 3년간 아주 외롭고 가난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노파와 말상대가 되지 않아 아주 살기가 아주 따분했습니다. 그런데 이 노파가 나의 닭을 한 마리 훔치는 일이 벌어졌지 뭐예요. 이일은 베일에 가려져 있고 노파 이외에는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닭을 위해 입씨름까지 했으며 청원까지 넣어 반대쪽 구역으로 숙소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3일쯤 지나 내가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니 니끼포르가 사발을 그 노파네 집에 두고 와서 스프를 먹을 그릇이 없답니다.

그녀가 항아리를 깨뜨렸다는 이유로 사발을 내주지 않았고 그 항아리 값으로 우리의 사발을 가져가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으며, 또 그것을 내가 직접 제안했다는 겁니다. 노파의 뻔뻔스러움에 나는 울화통이 터져 피가 끓어올랐고 그녀에게 달려가 이 빌어먹을 할망구야하면서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녀는 이상하게 두 눈을 부릅뜬 채 내 얼굴을 쳐다보고 한마디 대답도 않고 금방이라도 쓰려질 듯 흔들거렸어요. 나는 마침내 진정을 하고 몇 마디 물었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고, 나는 어쩔 줄 몰라 잠시 서 있다가 집 밖으로 뛰어 나왔고 소령이 부른다는 소리에 중대로 가야 했습니다.

저녁때 집으로 돌아오니 니끼포르가 어르신 그 노파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언제 죽었나!오늘 저녁때쯤이었는데 거의 한 시간 반 전입니다.그것은 내가 욕설을 퍼부어 됐을 때 노파가 세상을 떠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되는 겁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이 사건을 이렇게 보았다는 겁니다. 한 여성이 살았는데, 오래오래 살다 보니 너무 오래 산겁니다. 그녀는 한때 자식들, 남편, 식솔, 친척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즐거운 웃음소리가 구멍 속으로 들어가 사라져 버리고 저주받은 운명을 타고난 파리새끼처럼 그녀 홀로 남게 된 겁니다. 그러다 마침내 하느님이 그녀를 데려가 버렸던 거지요. 나의 노파는 기울어 가는 석양과 함께 고요한 여름날 저녁으로 날아가 버렸지요. 난폭한 욕을 해댐으로써 노파를 이세상의 표면으로부터 저 세상으로 전송해 주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내가 나쁜 인간이라 해도 전적으로 나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 나는 안정을 찾을 수 없었고 내가 안정을 찾았을 때는 15년쯤 고질병으로 시달리는 두 노파를 제 부담으로 대우가 좋은 양노원으로 보내 이승에서의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게 해주었을 때였답니다.각하께서는 생에 중 가장 추잡한 짓이 아니라 모범적인 행위를 애기 해 주셨어요. 페르디쉬첸꼬를 엿을 먹인 샘이지요!

 

내가 살아오면서 저지른 가장 혐오스러운 짓을 이야기해야 하는 임무라니, 또쯔끼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고통스런 마음으로 고백하자면 경솔하고 경박한 짓 중에서 아직까지 내 가슴속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20년 전쯤일 겁니다. 그때 나는 쁠라똔 오르딘쩨프가 사는 시골에 들른 적이 있었지요.

그 당시 소설 뒤마의 춘희가 대유행을 해서 상류 사회를 휩쓸고 있었습니다. 이 소설을 한번쯤 읽어 본 지방의 부인들은 열광적이다 시피 했습니다. 매력적인 소설 내용, 주인공 설정의 독창성. 미묘한 묘사에 황홀한 세계 매혹적인 요소들 예를 들어 하얗고 핑크빛 나는 동백꽃 다발을 번갈아 사용하는 배경은 한마디로 완상적인 디테일이었습니다.

대단한 열풍에 동백꽃이 이례적으로 유행했었습니다.

일개 군 지역에 모두들 무도회용으로 동백꽃을 원하게 되어 동백꽃이 많이 남아 있었겠습니까?

뽀뜨르는 그때 안피사 부인을 몹시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군수부인이나 백작부인등 손님으로 오는 분들이 하얀 동백꽃을 들고 무도회에 올 것이라고 했지요. 안피사 부인은 특별하게 보이기 위해 빨간 동백꽃을 원했어요. 남편 쁠라똔 오르딘쩨프를 내쫒아시피 하여 그 꽃을 구해오게 했답니다.

그런데 안피사와 무서운 라이벌 미찌쉬체바가 전날 동백꽃을 매점해 버렸던 것입니다. 히스테리를 부리며 기절한다고 난리를 피웠지만 남편은 허둥거리기만 할 뿐이고, 그와 같은 순간을 이용하기 위해 뾰뜨르는 몸부림치며 돌아다녔지만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녀의 생일과 무도회 전날 마주친 뽀뜨르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있어서 무슨 일이 있는가 물었지요.찾아냈어! 찾았어! 소도시 예끄샤이스끄에 사는 영감부부가 꽃을 무척 좋아하여 동백꽃을 키우고 있다는 거야무릎을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그 꽃을 얻기 전까지는 그곳을 떠나지 않을 거네! 언제 그 꽃을 얻으러 가려나? 내일 새벽 동이 틀 무렵 한 5시쯤. 행운을 빌겠네! 그 소식을 듣고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새벽 1시가 되도록 그 일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겁니다. 나는 이제 잠을 자야겠다고 하며 잠자리에 들려다 갑자기 아주아주 흥미로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마부를 깨워 4시경에 예끄샤이스끄에 도착하여 여관에서 동이 틀 때만 기다리다 6시경 영감의 집에 도착하여 않됀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노인에게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다고 소리쳤고 정 그렇다면 가져가시구려! 말이 떨어지자 즉시 빨간 동백꽃을 잘라 냈습니다. 일이 성사 되어 신바람이 났던 나는 돌아오는 길에 뽀뜨르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빙 돌아서 왔습니다. 뽀뜨르가 이 일을 알아차리고 나에게 칼부림을 하며 달려들 것이라고 생각하고 단단히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기조차 힘든 일이 벌어졌어요. 뽀뜨르는 기절을 했고, 저녁 무렵에 헛소리를 지껄이고 다음날은 온몸이 불덩어리가 되어 어린아이처럼 경련을 하며 울고 한 달 후에야 회복을 해서 까프가즈로 지원해서 떠났습니다. 크림에서 전사를 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양심의 가책으로 고통 받았습니다. 내가 그 부인을 사랑했다면 몰라도 그저 가벼운 장난으로 뾰뜨르를 곯려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내가 그에게서 꽃다발을 가로채지만 않았던들 그 사람이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아 있을지 누가 압니까? 만했어요. 속았어요. 누가 당신에게 이런 게임의 법칙을 이해하지 말라고 그랬나요? 현명한 사람들에게서 배워 보라고요!

 

나의생각 : 우리는 흔히들 가벼운 거짓말을 가볍게 말함으로 자신의 양심적 불편함을 덜어버리고자 하거나 자신이 무척 솔직하고 정직한 착각(페르디쉬첸꼬 같은 인간)하는 사람을 종종 만나게 된다. 관찰자 입장에 본 인간들은 그릇된 일을 행했을 때 속죄 고백하고 싶은 대상이 필요한 것 같다. 인간이란 하루에도 매순간 선택 결정권자로 살고 있으며 선택의 순간 늘 조심하고 경계하지만 잘못 판단하면 양심과 도덕을 넘는 행위를 하기도 한다. 도스또예프스키는 진실게임을 통해서 인간의 내면 제일 밑바닥의 인간의 간교한 자기합리성을 끄집어 벌거벗은 인간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벌거벗은 인간이 가장 무서워하는 게 양심이다. 양심이 사회적 공존의 장치로 문화적 진화를 해왔지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원초적 본능과 같이 인간의 근원적인 삶의 물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거짓말. 가벼운 거짓말도 누구에게는 치명적으로 운명을 바꿔 놓는 일이 되어버린다는 우연성에 자신의 행동과 정신을 들여다보는 일에 게을리 하지 말아야 된다. 거짓말의 가장 큰 피해자는 자기 자신이다. 진실게임을 통해서 보듯이 자신의 거짓된 행동의 진실은 자신만이 보고 느낄 수 있는 거울 같은 것이다.

 

백치 미시킨 공작의 사랑

 

미시킨 공작은 빼째르부르그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나스따시야 필리뽀브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대지주, 자본가 또쯔끼의 계획 아래 고아인 나스따시야을 양육하고 농락 했으며, 뛰어난 미인이다. 또즈끼는 그녀를 사교계에 들어올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며 그녀를 이용하여 사계교에서 더 많은 이익을 취하려고 했으나 나스따시야의 미의 권력은 또즈끼가 제어하기 힘들어진다. 또즈끼는 예빤친 장군의 딸 알렉산드라와 정략결혼을 반대하는 나스따시야를 가브릴라 (예빤친의 비서)에게 돈을 주고 시집보내려 한다. 야심가 가브릴라는 75천 루블에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나스따시야의 사랑을 얻기위해 다이아몬드를 허락도 없이 선물하여 아버지에게 쫓겨난 로고진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재산을 상속 받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야 10만 루블을 제시하며 나스따시야에게 자신과 결혼해 줄 것을 요청한다.

그녀의 생일이며 그녀의 결혼 발표 날 로고진의 돈 10만 루블 받고 75천 루블을 불타는 난로에 쳐 넣고 가브릴라에게 그 돈을 꺼내가라고 한다. 가브릴라는 돈을 꺼내지 않으나 심한 고통을 느끼며 자존심을 상한 가브릴라는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는다. 미시킨 공작은 나스따시야가 누구와 결혼하든 그 결혼으로 인해 파멸할 것이라 생각하며 그녀를 보호하겠다는 생각에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한다. 가난한 백치 미시킨 공작의 선언에 웃음을 터트렸으나 이때 공작은 후견인으로부터 거액을 상속받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후 나스따시야는 공작을 사랑하게 되고 나스따시야는 미시킨공작이 자신과 결혼하려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동정임을 알고 있다. 미시킨공작은 나스따시야의 타락은 죄가 없으며 자기희생을 통해 나스따시야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스따시야는 공작의 순수한 사랑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자신과 어떤 상황이 전개되면 방탕한 생활에 빠질 것이며 공작 또한 파멸로 떨어질 것이라 생각하며 두려움에 떤다. 나스따시야는 결코 사랑할 수는 없지만 자신과 비슷한 야만성과 방탕함을 가지고 있는 로고진과 함께 떠나지만 미시킨공작을 잊지 못한다.

나스따시야가 평범하지 않는 미모와 가난 때문에 또쯔끼의 정부되어야 했고, 자신의 미모 이용하여 사교계의 여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많은 남성의 선망의 중심이 서 있다. 화려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을 사랑으로 인식하며 속물적으로 살고 있는 로고진과 이해와 배려와 인간애적 사랑을 갈망하는 나스따스야 사랑. 미시킨공작.

나스따시야는 사교계라는 욕망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성자 같은 미시킨공작과 삶을 꿈꾸지만 자신의 내부에 물들어버린 향락적 달콤함을 물리치지 못한다.

미시킨이 사랑한 아글리야 그녀는 순수하고 순결하고 어린아이다운 모습하고 있다. 아글리야는 모두들 백치라는 공작의 사상과 행동을 이해하고 사랑하지만 인류애적 마음을 가진 공작이 자신의 사랑의 이기보다 헌신적 순교애에 눈감고 살 수 없는 사람이며 결코 나스따시야의 불행에 눈감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고 결혼을 거절한다. 니스따시야는 공작 미시킨과의 결혼식 날 파행을 하고 로고진과 도망친다. 그러나 나스따시야의 완전한 정신과 육체를 가질 수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로고진은 나스따시야를 죽이는 살인 선택하며 미시킨 공작은 다시 백치로 돌아간다.

 

 

나의 생각 : 나스따시야 (예쁜 여자)에 대한 고찰

인간사회가 만들어 놓은 미의 기준이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다는 게 놀랍지만 사람이나 동물(자신들만의 기준)이나 아름다움에 끌리는 것은 본능인 것 같다.

아름다운 여자는 늘 뭇 남성의 시선으로부터 관심의 대상이다. 그래서 예쁜 여자는 자신의 아름다움의 가치를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으며 자신의 아름다움을 이용할 수 있는 기제도 발달한 것 같다. 예쁜 여자는 남성의 시선을 통해 자신의 우월한 미적 본능을 이용하여 언제든지 이익을 얻을 수 있음을 인지하고 있다. 남성들은 예쁜 여자를 쟁취함으로서 자신의 지위와 남성으로써의 과시 보여주고 싶어 한다. 이런 이끌림에 변수는 물질()이라는 경제 산물에 의해서 본능적 선택을 할 수 없어 인간에게는 더욱 복잡한 결과를 초래한다. 물질과 돈은 본능적 육체와 정신적 가치와 대등한 높이로 필요물질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예쁜 여자 그녀가 가난하다면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삶을 살 수 없다. 가난한 예쁜 여자는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많은 남성들로 인하여 자신의 아름다움을 경제적 편의와 바꿀 수 있음을 알고 있고, 남성들 또한 가난한 여자의 아름다움이 돈이라는 물질에 약한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물질의 욕심이기 때문에 특별하다고 말하지 못하지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쁜 여자에게 많은 남자들의 관심은 기회와 동시에 위험이 될 수도 있다. 예쁜 여자가 주체적으로 독립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평범한 여자들 보다 더 경제적으로 자립적하며 견고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야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다.

 

(이뽈리뜨)의 불가피한 해명 : 나 죽고 난 다음에 무슨 일이 있건 말건

 

사람들과 나무들 사이에서 죽는 편이 용이할 것이다. 오늘 미시킨 공작은 죽을 것이다. 는 말 대신에 사는 편이 나을 것이다. 라고 했다.

내가 살날이 2주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일까? 그 이상일까?

몇 주일 정도는 살 가치도 없다는 생각이 진짜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한 달 전쯤부터 앞으로 4주일가량밖에 살날이 남아 있을 때였다. 내가 생의 마지막 시도(권총자살)를 해보려고 마음먹었다.

도프쓰끼㉠의 권리를 주장하고 싶었다. 사람들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나를 포옹하며 무언가 용서를 빌고 나 또한 그들에게 용서를 비는 꿈을 꾸어 보았다.

나는 6개월 동안 어떻게 확신 없이 살았는지 놀라울 뿐이다! 나는 내게 폐병이 그것도 치유 불가능한 폐병이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다. 내가 문제를 문명하게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더욱더 경련이 일어날 만큼 살고 싶은 마음이 강렬하게 생겨났다. 나는 삶에 집착하며 어떻게 해서라도 살고 싶었다. 나는 그때 왠지 모르면서 나를 파리처럼 짓이겨 버리기로 결정한 어둡고 적막한 운명에 화낼 수 있었다. 왜 나의 분노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가? 더 이상 삶을 시작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나는 삶을시작하려 하는가? 더 이상 시도해 볼 만한 것이 없는 걸 알면서도 왜 시도를 해보려 했는가?

나는 사람들이 그처럼 많은 살아갈 날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부자가 되는 법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자르니찐 가난뱅이가 굶어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엄청나게 울화가 치밀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 가난뱅이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나는 그에게 형벌을 내렸을 것이다.

내 주위 길거리에서 항상 근심 어린 표정으로 침울하게 이리저리 분주하게 쏘다니는 사람들을 참을 수가 없다.

왜 그들은 향상 우울하고 근심에 차 있고 분주해야 되는가? 인상을 찌푸리며 사납게 구는가? 앞으로 살날이 60년까지 남은 사람들이 불행하고 또 살아갈 법을 모른다니 그건 누구의 잘못인가? 왜 가난뱅이 자르니찐은 앞으로 60년을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굶어 죽게 방치했는가? 우리는 황소처럼 일을 하고 노동을 하지만 배를 곯아 가면 가난하게 산다! 다른 사람들은 일을 하지 않고 노동도 하지 않으면서 배부르게 살고 있다!나는 과거에 그들에게 왜 로스차일드 되지 못하는가?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임페리엘 금화와 나폴레옹 금화를 갖지 못하는 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살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수중에 들어올 텐데!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이제 모든 것이 나와 상관없다. ! 그때 나는 기원했다. 다 떨어진 옷 하나 걸친 열여덟 살의 나. 빵 한조각도 얻어먹을 친척이 없는 굶주린 채로 거대한 도시에 홀로 내버려진 내가 되도 좋으니,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면 난 무언가 보여 줄 것이다.

내가 지난 6개월 동안 살았던 삶은 백발의 나이에 사는 것과 맞먹는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누가 나를 인생 모르는 애늙은이로 보지 않겠는가? 나는 뜬눈으로 새는 밤을 그러한 얘기로 가득 채웠다. 그리스 어 문법을 학습하기 위해 문법책의 첫 장을 넘기는 순간, 문장론까지 진도가 나갈 때면 나는 죽고 말 것이다.나는 책을 책상 밑으로 던졌다.

사형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지나치게 삶을 경시하고 지나치게 삶을 값싸게 낭비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가 그러한 삶을 살만한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이리라!

 

행복은 과연 어디에서 있는 것일까? 콜럼버스가 행복을 느꼈던 것은 그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을 때가 아니라 발견을 시도했을 때였다. 틀림없이 사흘 전이었으며, 절망에 젖은 승무원들이 유럽으로 뱃머리를 되돌리려던 찰라 였으리라! 신대륙이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문제는 신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콜럼버스는 신세계를 거의 보지 못하고 자신이 실제로 무엇을 발견했는지조차 모른 채 죽어 버렸다.

문제는 삶에 있다. 오르지 한 가지 삶에 있는 것이다. 문제는 끊임없이 그 삶을 추구하는데 있지, 그 삶을 발견한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로고진 집에서 보았던 그림㉡이 불현 듯 생각났다.

그것은 그 집 가장 음침한 현관문 아래 걸려 있었다. 예술적인 면에서 그 그림은 뛰어난 것이 전혀 없었다.

그림 속에는 방금 십자가에 풀려난 그리스도가 그려져 있었다. 나는 화가들이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를 그릴 때나 십자가에서 내려진 그리스도를 그릴 때나 그 얼굴에 비범한 뉘앙스를 담긴 미를 반영한다고 알고 있다. 화가들은 그리스도가 가장 무서운 고통에 처해 있을 때의 모습에서도 그 미를 간직하려고 부심한다. 로고진 집에 있는 그림 속에는 미에 대한 언어가 전혀 없었다. 거기에는 인간의 시체가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을 뿐 이였다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에 받았던 끝없는 고통, 상처, 고뇌, 십자가를 지고 가거나 넘어졌을 때 행해졌던 보초의 채찍질과 사람들의 구타 고통을 다 참아 낸 자의 시체였다. 그것은 방금 십자가에서 내려진 인간의 얼굴이었다. 아직까지 많은 생기와 온기가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굳어 버리지 않아서 죽은 자의 얼굴에는 지금까지도 그가 느끼는 고통이 엿보였다.

그것은 가차 없는 진실이었고 그와 같은 고통들을 겪고 난 후 실제 인간의 시체는 그래야 했다.

초기에 기독교는 그리스도가 받은 고통은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였음을 내세웠다. 따라서 그의 육체는 십자가 위해서 완전히 자연의 법칙에 예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얼굴을 구타당해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고, 지독한 피멍이 들어 퉁퉁 부어올라 있었으며 두 눈이 감기지 않은 채 동공은 하늘을 바라보고, 커다랗게 허연 흰자위는 뿌연 유리 같은 광채를 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고통에 찢긴 이 인간의 시체를 보고 있노라면 매우 특이하고 야릇한 의문이 생겨났다. 그를 신봉하고 추앙했던 제자들과 미래의 사도들 십자가 주면에 서 있던 여인들 그들은 이 시체를 보면서 어떻게 저 순교자가 부활하리라고 믿을 수 있었을까? 만약 죽음이 이토록 처참하고 자연의 법칙이 이토록 막강하면 이를 어떻게 극복하겠는가? 생전에 자연을 물리지고 예속시켰던 자로서 그가 탈리다 쿰㉢라고 외치면 소녀가 일어났고 라자로야, 이리 오너라하면 죽은 자가 걸어 나왔는데, 그런 자마저 이겨 내지 못했던 자연의 법칙을 우리가 어떻게 극복하겠는가? 이 그림 속에서 자연이란 위대하고 귀중하기 짝이 없는 창조물을 닥치는 대로 포획하여 무감각하게 분쇄시켜 마구 삼켜 버리는 엄청나게 큰 첨단 기계처럼 보인다. 그 창조물은 자연 전체와 비견되고, 자연의모든 법칙들과도 비견되고, 지구 전체와도 비견되는 것인데 말이다. 사실 지구 자체도 오르지 이 창조물의 탄생을 위해서 만들어졌는지도 모르는데! 이 그림에는 모든 것을 예속시키는 어둡고 불손한 무의미하게 영원한 힘의 개념이 표현되어 우리에게 그대로 전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른손에서 갑자기 무언가가 번쩍거리는 것을 본 순간 조그만 권총이 그의 정수리 옆에 와 있었던 것이다 껠레르가 그의 손을 잡으려고 뛰어들자마자 그는 방아쇠를 당기고 말았다. 방아 쇳소리가 날카롭고 건조하게 찰칵거렸다. 그러나 발사되지는 않았다. 그는 의식을 잃은 듯 껠레르의 품 안으로 쓰러졌다. 내관이 아예 없어요. 그는 두 손을 꼭 잡고 내관을 넣는 것을 고의가 아니라 무심코 잊어버렸다고 하소연 했다.

 

나의 생각 : 읽는 것만으로도 굉장하다. 책을 읽는 내내 쉼 없이 삶과 죽음, 고통,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인간의 양심은? 시한부 삶이 나에게 다가온다면? 등 끊임없이 생각하게 한다.

불치병(폐병)에 걸린 이뽈리뜨와 같은 운명과 직면하게 된다면 지극히 인간다운 이볼리뜨와 같은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될 것 같다. 콜럼버스가 대륙을 발견하는데 있지 않고 삶을 추구하는데 있다고 아무리 긍정의 힘으로 위안 삼아도 쉽게 되지 않을 것 같다.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죽음의 자세를 어떻게 가질 것이며 현재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많은 생각들을 하게하는 시간 이였다.

어떤 책에서는 그러한 시간이 최고의 가치의 실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부여 받게 되는 시간이라고 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가 고통을 대하여 취하는 자세이며 우리 자신이 고통을 받아들이는 자세라고 하는데…….

한스 홀바인작의 예수그리스도그림은

신앙의 대상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볼 것인가? 인간의 성자로 예수를 볼 것인가? 는 믿는 자의 몫인 것 같다. 나는 인간의 성자로 예수를 존경한다. 그러나 기독교적 믿음에 동의하지는 않으면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순응할 수밖에 없으며 자연으로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갈 뿐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이뽈리뜨의 죽음에 대한 해명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이 책이 얼마나 멋진 책이며, 도스또예프스끼가 천재적인 작가인지 다시 실감하는 책읽기였다.

러시아어를 배워 원서로 읽어보고 싶다고 했더니 아들 녀석이 러시아어가 배우기 제일 어렵다고 한다.

러시아어 배우기는 포기하고 도스또예프스끼 작품 다 읽기???? 될까?????

 

한스 홀바인 작: 죽은 그리스도

바젤미술관은 특히 홀바인의 작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데 홀바인의 작품 중 해부학적으로 인체를 철저하게 관찰해 표현한 작품이 <무덤 속의 그리스도>이다. 이 작품은 당시 신성시되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인간적인 모습으로 표현하기 위해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좁은 공간에 누워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입술은 창백하며 얼굴은 짙은 녹색으로 변해 있다. 피로 물든 갈비뼈 주변의 상처는 녹회색으로 변해가고 있으며 발의 상처는 검은색으로 변했다. 상처의 색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섬뜩할 정도로 사실적으로 묘사된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은 처참하게 죽은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고통 속으로 걸어갔던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한스 홀바인<14971543>은 영국 헨리 8세의 궁정화가가 되기 전 바젤에 살면서 부유한 상인 한스 오버리트에 의뢰를 받아 1521년 이 작품을 제작했으며 1522 극단적으로 긴 수평적 구성을 지닌 이 작품을 완성했다. 홀바인은 반듯하게 누워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세를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와 프리델라의 <제단화>에서 영감을 얻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오로지 이 작품을 보기 위해 바젤에 들렸으며 작품을 보고 간질 발작을 일으킬 정도로 공포에 휩싸였다. 그는 <백치>에서 미슈킨 공작의 입을 통해 신앙심을 버리게 할 정도의 작품이라고 말했다.

 

 프티죄 : 프랑스에서 전해지는 놀이중 하나. 살아오는 동안 저지른 일중 가장 못된 짓을 양심적으로 고백하는 진실게임.

 

      ㉠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고통스럽게 풍자적으로 이야기 하여 주위 사람들의 동정을 얻어 낸다.

 

      ㉡한스 홀바인 작: 죽은 그리스도( 무덤 속 예수의 시신)

 

      ㉢마르코의 보음서 541절 소녀야 어서 일어나 거라.